오늘은 부활절감사예배 및 총동원 주일을 위한 40일 절식 및 릴레이 금식 5일째입니다. 모두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험하고 듣기 거북한 이야기들이 연일 메스컴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정신을 차리고 기도해야 할 이유를 잘 보여주고 있는 사건들입니다. 그럼 어제의 말씀을 이어가겠습니다.
221.“주여 주여”는 아름다운 부름입니다.
‘주여 주여’라는 부름에는 가장 아름다운 부름과 가장 저주스런 부름이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가장 아름다운 부름의 경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부름일 경우라면 그대가 주님과의 광명한 교제가 열려 있어 그 부름에 모든 사랑과 기쁨이 함축되어 있는 그런 부름의 경우일 것입니다.
주님과 교제가 활짝 열린 심령은 복이 있습니다. 천국은 이미 그의 마음속에 충만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따뜻한 상태입니다. 이제 막 말을 배운 어린 아기가 ‘엄마, 엄마’라고 부르는 것은 특별한 일이 있어서라기 보다, 본능적으로 엄마의 따뜻한 반응이 좋아서 그냥 부르는 것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름 속에는 전적인 신뢰와 편안함이 담겨 있습니다.
기도의 경우에서도 비슷합니다. 기도의 내용이 많고 할 말이 많을 때는 아직 하나님과의 최고의 영적인 교제 상태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이층천에 머무르고 있는데, 이층천이란 전적인 신뢰와 세상의 염려사이를 수시로 넘나드는 세계, 진실로 주를 사랑하나 세상의 염려와 근심의 끈을 완전하게 놓아 버리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안타깝지만 이런 상태에서는 진실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의 세계를 구하고 있지 못합니다. 감사와 기쁨이 염려와 근심과 더불어 서로 교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한 상태, 인간의 모든 욕망을 넘어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삼층천의 수준에 이르게 되면 인간적인 기도의 내용 별로 없어집니다. 눈부시고 찬란한 영광에 들어가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 단순히 ‘주여!’라는 말로도 만족하게 되고 부족함이 없게 됩니다. 그 위치에서는 더 이상 세상에서 바랄 것이나 부족한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단순히 “주님, 사랑합니다. 오! 주님 감사합니다. 주여! 주여!”라는 말만으로도 수만 마디의 말보다 더 많은 말을 하게 됩니다. 이런 감격의 교제 속에 있을 때 그 심령은 주님의 임재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하게 됩니다.
이런 심령을 가진 사람들은 ‘주여, 주여’할 때 그 음성에 쏟아지는 빛으로 감격합니다. 이런 사람은 이미 천국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런 심령 안에서는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나 죽는 것도 일반입니다. 이미 그의 자아는 세상에서 죽었고, 천국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대가 이런 영적 평화 속에서 ‘주여’라는 부름을 부를 수 있다면, 부름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이런 부름 속에서는 그대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비록 바울과 같이 감옥에 갇혀 있다고 해도 무한한 자유와 기쁨을 향유할 수 있습니다. 그 부름은 마치 강바닥은 울퉁불퉁하여 사납고 불편하기 짝이 없지만, 그 위로 유유히 흘러가는 물과 같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하는 무한한 희락이 넘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사랑스러우며 모든 것이 감사하며, 주님을 위한 그 어떤 희생과 수고도 감격할 뿐입니다. 이런 ‘주여, 주여’라는 부름은 가장 아름다운 부름입니다.
사랑하는 이여...!
이 비밀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런 게 어디 있느냐, 혹은 신비주의자 또는 광신자라고 몰아갑니다. 그러나 무당이 시퍼렇게 날선 작두 위에서 춤추는 것은 신비한 일로 믿으면서, 기독교의 삼층천의 신비를 믿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굳이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저급한 무당의 칼춤과 같은 일층천의 세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높은 수준의 삼승천의 세계입니다. 그대가 힘쓰고 애쓰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이층천의 하늘을 벗어나 삼층천의 하늘을 경험함으로 그야말로 복된 “주여, 주여”라는 부름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평안을 빕니다.
선한 안티 크리스천, 그 귀한 왕들의 귀환을 열망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