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월의 첫 주를 시작하는 아침입니다. 그대는 오늘도 아니, 항상 행복해야 합니다. 행복과 감사는 선택이 아니고 자연스럽고 당연한 그대의 일상입니다. 그대는 당연히 행복해야 하고 그대는 당연히 감사에 넘쳐야 합니다. 이것이 목자가 비는 기도입니다. 그럼 지난 주의 말씀을 이어가겠습니다.
212. 구약의 선지자와 신약의 선지자는 차이가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즉시 그대로 육성으로 전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선지자는 자신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여과하여 전했습니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꿈을 꾸거나 환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어떤 인격적인 성숙함이나 도덕적 탁월함을 요구받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구약 사사 중에는 매우 성품이 불량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인격은 신약시대 선지자만큼 완전성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그 자신의 있는 그 위치에서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그들의 임무는 완결된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발람 선지자는 황금에 팔려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러 갔지만, 광야에 진영을 베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는 순간 하나님의 신의 감동으로 저주 대신 축복의 예언을 했습니다(민 23:11). 발람은 자신의 개인적 윤리적 동기나 삶의 신앙적 기준 등은 크게 고려되지 않았고 다만 하나님 신이 임함으로써 그의 입은 하나님의 위임된 말씀을 전했을 뿐입니다. 그는 계시만 그에게서 떠나면 즉시 그는 죄와 연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불완전한 인간의 입을 쓰셨을 뿐아니라 당나귀의 입까지도 쓰셨습니다(민 22:28).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는 말씀하는 사람과 계시 사이에 간격이 거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모형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감정은 곧 하나님의 감정이요 주님의 의지가 곧 하나님의 의지였으며 주님의 생각이 곧 하나님의 생각이었기에 주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역사적 나사렛 예수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 그 자체가 우리 인류에게는 귀중한 복음입니다.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있어서의 선지자의 역할은 우리 자신과 하나님의 말씀과의 완전한 일치가 최고의 이상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는 발람과 같이 죄악된 우리 자신 그대로를 두고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곧 거짓 선지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아니하는 선지자의 사역은 곧 거짓 선지자입니다.
신약시대 말씀의 사람들은 말씀과 그 자신이 일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 자신의 감정과 의지 그리고 생각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되어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을 취하신 것과 같이, 오늘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인격을 취하셔서 전인격적으로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말과 연합하기 위하여 그대의 인격으로 구체화된 성육신으로 나타나시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일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성령님은 그대 안에 내주하셔서 성화로 이끌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이여...!
그대는 말씀과 분리되면 안됩니다. 이것이 율법과 은혜의 큰 차이이기도 합니다. 율법의 조문을 바라보고 읽으며 내가 지키려고 노력하면 되지만, 은혜는 그 말씀이 나와 영적인 인격과 일체를 이루어 생각과 행동으로 보이는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그 말씀에 그대를 실어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는 어렵지만, 일단 물에 뜨는 순간부터는 매우 편안한 상태로 물결을 따라 흘러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오늘도 그대의 하루가 성령과 말씀이 이끌리시는 평안함이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선한 안티 크리스천, 그 귀한 왕들의 귀환을 열망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