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근본적으로 교회의 송사를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는 것을 금한다. 그리고 실제 판사들도 교회사건을 다루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고 한다. 교회 사건에서는 명판결이 나올 수 없고, 아무리 공정하게 판단해도 일방의 신앙적 비판과 비난을 감내할 이유도 또 감당도 안되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어쩌다가 우리 교회가 툭하면 법원으로 달려가 모든 일을 해결하고자 하는 지, 이 썩은 작태에 대해 신년 벽두부터 심각하게 고민해 보자.
가령 교회법으로 처벌할 근거가 없고, 인신구속이 불가능한 폭력이라든지 경제사범들을 제외한 순수한 교회에 관련된 사항들은 각 교단의 헌법과 장정 그리고 규칙과 규범으로 충분히 다스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검경과 판사에게 호소하는 것은 아무리 양보하고 생각해도 세상에다가 교회의 운명을 내어주는 꼴이며, 그들에게 멱살을 잡히는 자승자박의 대참사를 충분히 예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지금도 교회 사건은 법정으로 가고 있다. 당연히 주요 사건은 일간지와 메인 방송의 전파를 탈 것이고 그 덕분에 기독교의 위상은 한없이 추락하고 만다.
근자에 사랑의 교회 담임목회 위임에 관한 목사 자격 문제가 법정에서 가려진 것이 너무 가슴 아프다. 필자는 그 결정의 내용에 관하여 논하고 싶은 생각은 없을 뿐 아니라, 해당자와 이해 관계도 없고, 그 교회의 일에 개입할 생각도 없다. 다만 그 일이 세상 법정의 권위로 결정되었다는 점이다. 교회법의 결정이 법원의 결정만 못할까? 혹시 우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가진 신학적 역사적 자산이 세상 법정에 호소해야 할 정도로 빈약한가?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세상의 상당한 법령들이 성경에서 나왔고, 그것만이 아니라도 적어도 세상법보다는 교회법이 역사와 사고에서 한참을 앞서 있다. 그런 위대한 자산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교회는 세금이며, 세습이며, 기타 등등의 문제로 법정으로 끌려가 그들 앞에서 하나 하나 착실히 밝혀져 천하에 공개되고 있으니, 이를 온전히 해명하고 발명할 길도 시간도 없이 그대로 당하고 마는 선교현장의 무너짐이 험하다. 더 이상 방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교회는 스스로의 자정능력을 믿고 또 키워야 한다. 세금도 세습도 교회 안에서 결판이 날 때까지 다툴 일이다. 우리의 정의로운 의지와 도우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끝까지 가야 한다. 우리의 신앙 순수성과 주님의 도우심을 믿고 가면 된다. 세상 법정으로는 고개를 돌리지 말라. 만약 세상으로 끌고가고자 한다면 교회는 그를 공개적으로 판단할 준비를 해야 한다. 법정으로 끌고 가는 것은 그의 권리이겠다고 하지만, 세상법에 굴복하는 교회법은 없으므로 이에 대한 강력한 힘을 비축하고 보여 주어야 한다.
목회자들과 장로들 그리고 개교회 운영에 책임있는 이들은 이에 대한 대대적인 각성이 필요하다. 조문객이 더 슬플 수 없고, 위로자가 상처 입은 자보다 더 아플 수는 없다. 그런데 교회는 느닷없이 조문객이요 위로자를 자처한 세상에게 우리의 수치를 보여 주는 것도 모자라 우리 운명의 밧줄을 주고 말았다. 맹수에게서 먹잇감의 상처는 다시 없은 사냥의 호기임을 알아야 한다. 지금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아다니고 있는 마당에 그 입에다 우리 교회를 그냥 처넣어 주는 우를 범하여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이슬람은 스스로의 율법으로 세상법을 압도한다. 그들은 어느 나라의 헌법이라도 그들의 율법의 권위를 능가할 수 없고, 이슬람 신도들은 세상 법정의 판결보다 그들의 율법적 판단을 더 두려워하고 따른다. 이것이 이슬람이 급속도로 성장하는 이유인 것을 교회 지도자들은 알고 있는가? 지금도 수없는 교회 사건이 판검사들의 책상위에 있다. 이를 어찌할 것인가? 우리 스스로 더 자성하고 청결을 회복하려고 몸부림치면서 동시에 세상과 기꺼이 맞설 수 있는 용기로 이 시대에 책임있는 인사들이 모여 해답을 찾아야만 한다. 별로 시간이 없어보이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