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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대예배 설교

Sun Jul 16 2017 02:00:00 GMT+0000 (Coordinated Universal Time)

주보 :

제목 :

제목 : 평화의 비용

본문 :

본문 : 창14:13-16

이번 주 목요일인 20일에 개봉할 ‘군함도’란 영화가 대단한 인기입니다. 이 영화는 1945년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의 서울인 경성의 반도호텔의 악단장이었던 ‘강옥’(황정민)과 그의 하나뿐인 딸 ‘소희’(김수안), 그리고 종로 일대를 주름잡던 주먹인 ‘칠성’(소지섭)과 일제 치하에서 온갖 고초를 겪어온 ‘말년’(이정현) 등 각기 다른 사연을 품은 조선인들이 일본에 가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 배를 타고 일본 군함도로 향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함께 탄 배가 도착한 곳은 조선인들을 강제 징용해 노동자로 착취하고 있던 지옥과 같았던 태평양 앞 바다에 있는 일본 나카시마 현의 작은 섬 군함도라는 섬이었습니다. 영화는 이 군함도에 잘못 간 한국인들이 그 섬을 탈출하는 모습을 그린 탈출을 내용으로 한 영화입니다. 영화 ‘군함도’는 정말 지옥섬 군함도에서의 그 처절한 모습을 담고 있어 관객들로 하여금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 우리 조상들의 그런 처절한 고통을 대가로 하여 오늘날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우리 자유대한민국의 평화가 이뤄진 것입니다.

지금 전 세계가 중국의 노벨상 수상자인 평화운동가 류샤오보의 사망에 대하여 충격을 받고 있습니다. 1989년 중국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저항운동인 천안문 광장사태가 벌어지고 수백명이 중국군 탱크에 깔려서 사망하였다는 엄청난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광주민주화와 같은 내용입니다. 당시 뉴욕 컬럼비아대에 방문 학자로 근무중이었던 류사오보가 그 소식을 듣고 즉시 중국으로 귀국해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게 됩니다. 천안문 민주화운동에 가담했던 지도부 대부분이 해외로 망명했지만 류샤오보는 그 후 중국에 남아 중국 민주화 활동을 계속하다가 네차례나 구속과 석방을 되풀이 했습니다. 류샤오보는 결국 국가 전복 혐의로 11년형 선고를 받고 다시 수감되었고 옥중에서 2010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지만 당국의 반대로 수상식에도 참석하지 못하였습니다.

류사오보는 죽음 직전에 병상에서 꺼져가는 생명을 붙잡고 있으면서 독일이나 미국에 가서 병 치료를 받을 것을 희망한다고 신청하였으나 중국당국의 거부를 당하였습니다. 그가 외국행을 강력하게 원하는 이유는 자기의 병든 몸을 치료하려는 목적보다는 죽기 전에 부인 류사와 처남을 독일로 보내려는 의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중국당국은 모든 것을 거부하여서 드디어 마지막을 맞고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아내에게 “잘 사시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평화를 위한 값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61세로 세상과 하직한 류사오보입니다.

한 나라와 공동체는 어느 날 갑자기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 그 때에 이르기까지의 수많은 노력과 희생을 바탕으로 거름하여 유지되고 탄생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 많이 지불된 국가나 공동체일수록 더욱 뭉쳐지고 다져지고 단단한 결속력을 가진 국가가 되는 법입니다. 평화를 위한 비용, 이것이 참으로 고귀하고 값진 비용입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던진 사람들은 국립묘지에 묻혀 있습니다. 경제발전을 위하여 밤낮없이 수고한 사람들의 희생으로 국가 경제가 발전하였습니다. 독재가 이 나라를 이끌 때에 독재를 항거하여 목숨을 던진 사람들로 인하여 이 땅에 민주화가 세워져 왔습니다. 모두가 평화의 비용을 지불한 사람들입니다.

건강한 공동체일수록 이렇게 대가를 지불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정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든 공동체는 다 동일합니다. 평화를 위한 비용을 잘 지불하면 그러면 그 공동체는 살아납니다. 그러나 그 일을 망설인다면 거기에는 평화를 지켜나갈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희망을 노래하고 평화를 노래할수록 거기에 따르는 비용을 지불하고 댓가를 지불하면서 섬기고 세워가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이 평화의 비용을 지불하기를 요청하십니다. 그 비용을 잘 지불하며 살아야 주어지는 평화를 아름답고 소중하게 지켜갈 수가 잇을 것입니다.

1. 현실과 약속
13: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유명한 아브라함과 롯 사이의 대화입니다. 애굽에서 돌아와서 일정한 시기가 지나자 이제 삼촌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가족도 늘어나고 양과 염소 같은 목축의 재산도 많아지자 가끔은 다투는 일들도 생깁니다. 아니 말씀의 문맥을 보면 서로 간에 크게 한 번 다툰 듯합니다. 좁은 지역에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다 보면 당연히 불편하게 되고 거기에서 여러 가지의 문제가 발생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화장실을 사용하기도 불편하였을 것이고 잠자리도 무척이나 불편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풀기가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기 십상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과 롯, 두 사람은 더 이상 이 둘의 식솔들이 같이 지내면서 목양하기가 어려워진 지경에 이르렀다고 판단합니다. 그러자 삼촌인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제안을 하였습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삼촌의 제안을 받은 롯은 생각합니다. ‘맞다 이제 삼촌의 말처럼 우리가 같이 더불어서 한 울타리에서 지내기란 불가능하여졌구나. 그러하다면 이제 떠나서 살기가 적당한 시점이 되었다’ 그렇게 본 것입니다. 그리고는 먼저 선택권을 준 삼촌의 의견처럼 자기가 선택권을 행사하려고 눈을 들고서는 그 앞에 펼쳐진 요단의 들녁 이곳 저곳을 둘러봅니다.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는 삼촌이 고맙다는 생각입니다. ‘정말 우리 삼촌은 좋은 사람이야 마음이 넓기가 태평양만큼이나 되는 것 같아’ 그럽니다.

이런 현상은 어디에서나 다 마찬가지이며 오늘날 교회도 동일합니다. 사람들이란 여러 가지 여러 보양들입니다. 삶의 모습들이 서로 다르고, 나이도 다르고, 서로의 가치관도 다르고, 생활의 패턴들도 다르고 정말로 가지가지가 서로 다른 사람들의 모여 지내는 곳이 교회입니다. 정말 우리 문제로는 주차공간도 부족하고 같이 앉아서 차 마시는 공간도 부족하고 온갖 것들이 다 불편하기 쉬운 우리들의 공간들입니다. 오래 믿은 사람들도 많고 지금 막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한 성도들은 그래도 오래 믿은 집사들이나 장로, 권사, 목회자들은 무엇이 달라도 다르겠지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오래된 분들은 막 시작한 분들은 당연히 조용히 배우면서 시작해야 하리라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다르고 생각의 방향들이 다릅니다. 그러니 당연히 갈등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는 
10절,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이 때에 롯은 자기가 먼저 삼촌에게 고맙다고 생각하기 전에, 아니 눈을 들어 요단지역을 바라보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들이 있었는데 그걸 접었습니다. 그리고 눈을 들어서 그 길을 바라 봅니다.

지금까지 롯은 아브람을 그대로 따르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란에서 가나안을 따라서 왔습니다. 가나안에서 흉년이 들자 ‘우리 애굽으로 가자’고 말하는 삼촌을 따라서 그대로 애굽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애굽에서 다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제 다시 가나안으로 가자라는 삼촌을 따라서 이제 가나안 입구 소알 땅까지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더 이상 계속하여 따라 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 듯합니다. 그래서 “나를 떠나가라”는 삼촌의 말에 그대로 따르기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제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이 되었습니다. 롯은 이제는 떠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인생은 언제나 선택입니다. 롯도 지금까지는 삼촌과 같이 따라왔고 서로가 같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선택해야 할 시기입니다. 떠날 것인가 말 것인가 이제 선택할 시기입니다. 사람은 늘 선택의 기로에 서기 마련입니다. 어떤 회사에 들어갈 것인가, 누구를 만날 것인가, 누구와 결혼할 것인가, 무얼 먹을까 무얼 마실까 늘 선택의 기로에 서기 마련입니다. 그 시점에 롯은 눈을 들어서 멀리 가나안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선택을 위한 바라봄입니다.

중요한 선택의 시점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실까 그걸 생각하고 그걸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기도하고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지혜를 구하고 도우심을 요청하여야 합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내 경험이나 내 생각이나 내 것이 앞서면 그는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중심의 사람입니다. 여러분들과 저는 인생의 삶의 중요한 고비에서 하나님께 엎드리고 기도하고 아멘하고 그리고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2. 선택의 순간
10절,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이제 두 사람은 서로 나눠지는 갈림길에 섰습니다. 이 시점에서 롯이 눈을 들어서 요단강 주변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자기가 선 곳에서 저 소알까지는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의 동산 같고 마치 얼마 전에 지나온 목축하기에 너무나 좋았고 먹을 양식이 풍부하였던 그 기름지고 아름다웠던 애굽 땅과 같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소알 땅이면, 이것이면 풍족하고 여기면 얼마든지 터 잡고 살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수많은 가족들과 가죽들을 이끌고 고생하며 왔다 갔다 이사 다닐 걱정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믿음은 어디 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장 눈 앞의 이 소돔 고모라가 있는 이 좋은 소알 땅은 온 땅에 물이 넉넉하였습니다. 목축하기에 너무나 알맞아 보였습니다. 마치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습니다.
 
장사하는 사람에게는 장사의 목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에 아무리 좋은 가게는 차려 두어도, 아무리 싸게 판다고 세일을 선포하고 전단지를 돌리고 광고를 하여도 사람들이 잘 찾아오지를 않습니다. 목축하는 사람들에게도 목초지가 풍성한 땅이 너무나 중요하고 너무나 필요한 것입니다. 물이 넉넉하고 풀이 많으면 아무런 걱정거리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물과 풀이 풍족한 땅을 조카에게 그대로 양보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카 롯은 그게 마음에 흡족하였던 것 같습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어떻게 아브람이 이렇게 양보를 할 수가 있었을까요? 몇가지의 해석이 가능합니다.
우선, 롯은 조카이기 때문입니다. 조카인 롯이 지금까지 아브람을 잘 따라왔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어른으로서 양보한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눈에 보이는 조건보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그 가나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하나님의 그 보장된 약속입니다. 아브람은 지금 눈 앞에 펼쳐진 그 요단 주위의 아름다움보다 가나안의 그 약속, 넉넉히 주리라는 그 약속 그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푸르른 그 목초지를 조카에게 양보하는 여유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하나님의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굳게 믿었습니다. 복이 되고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그 엄청난 약속이 있었기에 지금 눈 앞에 보이는 문제 이건 훨씬 적은 것들이요 소소한 것들입니다. 그러니 이 정도는 충분히 이기고 넘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소알, 그 너머에 엄청난 약속의 땅 가나안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브람에게는 그 가나안을 보는 믿음의 눈이 있었습니다. 지금을 넘어서 있는 약속, 그걸 붙잡은 것입니다. 눈 앞의 것보다 보이지 않는 저 멀리의 그 약속, 그러므로 충분히 이기고 극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이 귀에 아무소리 아니 들려도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리라

하나님은 기도하는 아브람, 하나님 앞에서 이제는 더 이상 실수하지 않으려고, 제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그 아브람을 지켜주시고 그 땅을 보호하셨습니다. 이제 아브람은 더 이상, 하나님의 약속을 못 믿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적어도 아브람에게는 애굽에서의 고통은 충분한 수업료를 지불하고 경험한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고통을 단순히 경험으로만 지나면 안됩니다. 그 고통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를 발견하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왜 이러한 고난이 나에게 왔을까?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 때문에 이러한 고난의 과정을 통과하게 하실까, 하나님 앞에서 그걸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답변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이 사람들입니다.

아브람은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적어도 조카와 목초지를 두고 싸우라고 이곳으로 부르신 하나님은 아니심을 알았습니다. 목초지의 선택권보다 더 중요한 그것, 그것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아브람은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먹고 사는 이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여기서 목양을 잘하고 그리고 잘 먹고 잘 살아라 그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아브람과 조카 롯, 그들은 같이 하란에서 살았는데 그곳에서도 얼마든지 싸울 수가 있었는데 여기까지 불러놓고 여기서 싸워라 그건 아닌 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담대히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고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리라 라고 담대하게 양보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선택의 순간 롯은 믿음으로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계산하며 선택하였습니다. 롯과 우리는 얼마나 다른 사람들입니까? 혹시 우리는 너무 계산적이지 않습니까? 너무나 하나하나 따지고 계산하며 주산알을 놓고 그러지 않습니까? 요즘 결혼하는 사람들은 깊이 있게 사람을 보려고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너무 앞에 나타난 것들만 보고 계산합니다. 결혼하겠다는 사람들이 상대편을 만나고 대화해 보고 그리고 선택하여야 하지 않습니까? 주고 받는 사진 한 장 보고 선을 볼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게 일반적인 듯합니다. 결혼을 하면서도 아이는 하나만 낳기로 결정하고 결혼하는 것은 너무나 자기 중심의 이기주의는 아닙니까? 매사에 우리는 너무나 계산적입니다.   

아브람은 하란에서 자기를 부르신 그 하나님, 나를 향한 그분의 계획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 큰 것을 가지기 위하여 이 작은 것, 목초지쯤은 조카에게 충분히 양보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네가 우하면 나는 죄하고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리라”라고 멋지게 양보하는 통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바라보는 하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물이 많은 이 소알땅, 양들을 먹일 풀이 풍부한 이 소알 땅을 바라만 보고 결정하지 마십시오, 이 눈에 안 보여도, 이 귀에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헤브론, 그 헤브론이 있는 가나안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시선은 그곳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곳을 희망하십시오. 그곳을 선택하십시오. 소알과 헤브론, 지금 눈 앞의 소알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저 멀리 헤브론을 보고 가나안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평화는 지금보다, 바로 눈 앞의 것보다 저 멀리 보고 저 멀리에 투자하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3. 평화를 위한 댓가
11절,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마침내 롯은 눈 앞의 초지 소돔 고모라를 선택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무런 대가도 없이 소돔 고모라 땅을 차지합니다. 우선 눈에 보이는 대로 푸른 초지 많은 물가를 선택하였습니다. 그 소알 땅이 마치 하나님이 가라고 보내신 준비하신 바로 그 땅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선택이 실패의 길로 들어 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롯은 이성적인 사람이요 현실적인 사람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안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분명 하나님을 믿은 사람이지만 그러나 자기의 이성의 범위 안에서 믿었습니다. 이성을 벗어나는 일을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모험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선택의 기회에서 얼른 이성적 판단으로 목초지가 풍부하였던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이성적 판단으로는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동산 같았고 애굽의 땅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티그리스 강, 유브라데스 강 등, 네 강이 흘러서 내려오던 여호와의 동산 메소포타미야, 나일강이 있어 목양이나 농사가 풍성하였던 그 애굽, 롯이 보기에는 바로 눈 앞에 펼쳐진 이 소돔과 고모라는 바로 그런 땅이라고 판단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성적 판단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그렇게 선택하였으면 잘 살아야 했습니다. 분명히 잘 살아가야 하였습니다. 그런데 평화를 위하여 믿음을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데 조카 롯에게는 그게 없었습니다. 평화를 위한 대가가 없었습니다. 나에게 주어지는 평화를 지키고 유지하려면 반드시 그에 맞는 대가가 나에게서 나와야 하였습니다. 그냥 얻기에만 급급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비극이 오고 말았습니다. 푸른 초장은 그냥 내 손에 고대로 다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걸 차지하려면 거기에 알맞은 대가가 반드시 필요하였습니다.

내 앞에 어떤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는 한 번 쯤은 깊이 생각하고 기도하고 그리고 행동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적어도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내가 행동해야 할 일들이 떠오르게 될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하더러도 내가 그 일에 맞는 사람이지 아닌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하여 나는 할 일이 무엇인지, 내가 그걸 해 낼 수 있을지 없을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이성적 판단으로 그저 좋다, 내게 손해나지 않는다, 나에게 유익이 되겠다, 그래서 그대로 덤비기만 한다면 실패하기 쉽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1,12절,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소돔 고모라라는 평온의 초목지를 선택하여 간 롯에게 엄청난 위기가 닥쳤습니다. 바벨론이 생기기 전, 그곳 엘람이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엘람 왕 그돌라오멜은 아주 큰 왕이었습니다. 그는 가나안까지 통치권 아래에 둔 큰 왕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매년 그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12년을 지냈는데 그만 배반하였고 이를 분하게 여긴 그돌라오멜이 이웃 4왕과 연합하여 소돔고모라를 침공하여 온 것입니다. 마침내 그들 4연합군은 소돔 고모라에 거주하던 아브람의 조카 롯과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끌고 가 버렸습니다.

지금까지 소돔과 고모라가 푸른 목초지와 물이 풍부한 요단 땅을 유지하고 안전하게 살았던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하면 그들이 평화의 비용을 지불하였기 때문입니다.

4절, “이들이 십이 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소돔 고모라는 그돌라오멜에게 일정의 평화의 비용인 조공을 바쳐왔습니다. 그 비용이 중요합니다. 12년간 그들이 바치면서 나라가 조용하니까 이제 이 평화는 유지되려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평화가 마치 공짜라는 생각을 하고는 바치던 조공을 거둡니다. 그러나 그들이 한 가지 잘못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평화는 결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입니다. 평화는 공짜로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고 그 결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소돔 고모라가 비용을 중단하자마자 바로 전쟁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엄청난 혼란이 시작되었습니다.

롯이나 소돔 고모라 사람들이 모르고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들이 누리는 평화가 저절로 주어지는 공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잘 될 거야, 그러다가 난리가 난 것입니다. 사람들이 잡혀갑니다. 엄청난 재물까지 다 노략당하고 말았습니다. 왜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지불을 멈추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누리는 이 평화를 잘 유지하기 하여선 반드시 유지비용이 필요합니다.

이 비보 소식을 아브람이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조카가 잡혀간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아브람에게로 떨어졌습니다. 소돔고모라 선택은 롯이 하였지만 그러나 그 롯을 지키고 세워가는 일에 아브람은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골육이라고 말하였던 아브람, 하란에서부터 그를 데리고 내려온 아브람, 이제 아브람은 그 조카를 찾아와서 평화의 상태로 만들기 위하여 들 경비를 계산하였습니다. 평화를 되찾기 위하여, 사랑하는 조카를 데려오기 위하여 거기에 들어갈 평화를 위한 경비 계산을 하였습니다. 나와 언약을 맺은 형제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나를 필요로 한다는 그 한 가지 사실만을 이유로 그는 그 전쟁에 뛰어 들었습니다. 평화를 위한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려고 나섰습니다.

14-16절,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기르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

집에서 기른 318명으로 조카를 찾기 위하여 4연합군을 침공합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개입과 도우심으로 그들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승리하여 조카를 찾고 빼앗겼던 재물들을 찾아왔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사람의 수나 병거의 수로 결정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조카를 찾아오는 그 엄청난 평화의 비용, 아브람은 이렇게 평화의 비용을 지불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서는 그에 알맞은 평화유지 비용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려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습니다.  베드로사도의 말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2:24).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화평을 주시려고 십자가라는 평화의 대가를 지불하신 주님이십니다. 최고로 값진 대가를 지불하셨고 그리고 우리는 그 댓가로 평화를 누리며 사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직장에 나가서 돈을 벌어오는 것만 돈버는 것이 아닙니다. 집에서 아무런 사고가 나지 않도록 아이들을 잘 돌보는 일이 평화를 지키는 힘입니다. 자녀들이 잘 커주고 잘 자라는 것이 평화를 지키는 힘입니다. 지나가는 도로에 아무런 사고가 나지 아니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려면 자동차를 안전하게 몰아야 합니다. 지나가는 버스도 잘 정비하여야 하고 지나친 폐타이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하며 운전자도 졸지 아니하고 제대로 운전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여기까지 왔다면 누군가가 엄청나게 이 평화 유지를 위하여 댓가를 지불하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집안에서 엄마가 힘들게 아이들을 돌보고 키우고 가르치니까 아이들이 잘 자라고 잘 배우고 커 갑니다. 그 아이들보는 일, 그게 비용이 되어서 자녀들이 무럭무럭 자랍니다. 엄마의 그런 비용이 없으면 자녀들이 제대로 자라나지를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엄청난 가정 세우는 비용이 지불되어 갈 것입니다. 직장에 나간 아빠나 엄마가 열심히 일을 하여서 돈을 법니다. 그 댓가가 가정을 세우고 지켜 갑니다. 나라를 지키는 산업의 현장의 사람들이 있기에 그 나라경제가 성장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 어두운 곳에서 이 사회를 지키기 위하여 수고하는 경찰들, 이런 분들이 다 평화를 지키는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분들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기 위하여 내게 주어진 그 일들을 다 하여야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주어진 일들을 다할 뿐 아니라 역으로 하고 싶은 말들도 때로는 억지로라도 줄여 나가야 합니다. 참으면서 세워가야 합니다. 인내하면서 양보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평화가 유지될 것입니다. 평화의 유지비용이 필요합니다. 교회를 위하여, 가정을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평화의 비용을 잘 지불하시기 바랍니다.

골1:24절,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내 몸에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한 고난으로 채우는 일이 교회를 위한 비용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내 몸에 채워야 제대로 된 댓가가 지불됩니다. 그럴 때 교회가 성장되고 그리스도의 몸이 제대로 유지되고 바르게 성장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렇게 비용을 지불하면서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오늘을 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맺음 :
이번 주 목요일인 20일에 개봉할 ‘군함도’란 영화가 대단한 인기입니다. 이 영화는 1945년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의 서울인 경성의 반도호텔의 악단장이었던 ‘강옥’(황정민)과 그의 하나뿐인 딸 ‘소희’(김수안), 그리고 종로 일대를 주름잡던 주먹인 ‘칠성’(소지섭)과 일제 치하에서 온갖 고초를 겪어온 ‘말년’(이정현) 등 각기 다른 사연을 품은 조선인들이 일본에 가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 배를 타고 일본 군함도로 향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함께 탄 배가 도착한 곳은 조선인들을 강제 징용해 노동자로 착취하고 있던 지옥과 같았던 태평양 앞 바다에 있는 일본 나카시마 현의 작은 섬 군함도라는 섬이었습니다. 영화는 이 군함도에 잘못 간 한국인들이 그 섬을 탈출하는 모습을 그린 탈출을 내용으로 한 영화입니다. 영화 ‘군함도’는 정말 지옥섬 군함도에서의 그 처절한 모습을 담고 있어 관객들로 하여금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 우리 조상들의 그런 처절한 고통을 대가로 하여 오늘날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우리 자유대한민국의 평화가 이뤄진 것입니다.

지금 전 세계가 중국의 노벨상 수상자인 평화운동가 류샤오보의 사망에 대하여 충격을 받고 있습니다. 1989년 중국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저항운동인 천안문 광장사태가 벌어지고 수백명이 중국군 탱크에 깔려서 사망하였다는 엄청난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광주민주화와 같은 내용입니다. 당시 뉴욕 컬럼비아대에 방문 학자로 근무중이었던 류사오보가 그 소식을 듣고 즉시 중국으로 귀국해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게 됩니다. 천안문 민주화운동에 가담했던 지도부 대부분이 해외로 망명했지만 류샤오보는 그 후 중국에 남아 중국 민주화 활동을 계속하다가 네차례나 구속과 석방을 되풀이 했습니다. 류샤오보는 결국 국가 전복 혐의로 11년형 선고를 받고 다시 수감되었고 옥중에서 2010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지만 당국의 반대로 수상식에도 참석하지 못하였습니다.

류사오보는 죽음 직전에 병상에서 꺼져가는 생명을 붙잡고 있으면서 독일이나 미국에 가서 병 치료를 받을 것을 희망한다고 신청하였으나 중국당국의 거부를 당하였습니다. 그가 외국행을 강력하게 원하는 이유는 자기의 병든 몸을 치료하려는 목적보다는 죽기 전에 부인 류사와 처남을 독일로 보내려는 의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중국당국은 모든 것을 거부하여서 드디어 마지막을 맞고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아내에게 “잘 사시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평화를 위한 값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61세로 세상과 하직한 류사오보입니다.

한 나라와 공동체는 어느 날 갑자기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 그 때에 이르기까지의 수많은 노력과 희생을 바탕으로 거름하여 유지되고 탄생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 많이 지불된 국가나 공동체일수록 더욱 뭉쳐지고 다져지고 단단한 결속력을 가진 국가가 되는 법입니다. 평화를 위한 비용, 이것이 참으로 고귀하고 값진 비용입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던진 사람들은 국립묘지에 묻혀 있습니다. 경제발전을 위하여 밤낮없이 수고한 사람들의 희생으로 국가 경제가 발전하였습니다. 독재가 이 나라를 이끌 때에 독재를 항거하여 목숨을 던진 사람들로 인하여 이 땅에 민주화가 세워져 왔습니다. 모두가 평화의 비용을 지불한 사람들입니다.

건강한 공동체일수록 이렇게 대가를 지불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정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든 공동체는 다 동일합니다. 평화를 위한 비용을 잘 지불하면 그러면 그 공동체는 살아납니다. 그러나 그 일을 망설인다면 거기에는 평화를 지켜나갈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희망을 노래하고 평화를 노래할수록 거기에 따르는 비용을 지불하고 댓가를 지불하면서 섬기고 세워가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이 평화의 비용을 지불하기를 요청하십니다. 그 비용을 잘 지불하며 살아야 주어지는 평화를 아름답고 소중하게 지켜갈 수가 잇을 것입니다.

1. 현실과 약속
13: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유명한 아브라함과 롯 사이의 대화입니다. 애굽에서 돌아와서 일정한 시기가 지나자 이제 삼촌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가족도 늘어나고 양과 염소 같은 목축의 재산도 많아지자 가끔은 다투는 일들도 생깁니다. 아니 말씀의 문맥을 보면 서로 간에 크게 한 번 다툰 듯합니다. 좁은 지역에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다 보면 당연히 불편하게 되고 거기에서 여러 가지의 문제가 발생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화장실을 사용하기도 불편하였을 것이고 잠자리도 무척이나 불편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풀기가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기 십상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과 롯, 두 사람은 더 이상 이 둘의 식솔들이 같이 지내면서 목양하기가 어려워진 지경에 이르렀다고 판단합니다. 그러자 삼촌인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제안을 하였습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삼촌의 제안을 받은 롯은 생각합니다. ‘맞다 이제 삼촌의 말처럼 우리가 같이 더불어서 한 울타리에서 지내기란 불가능하여졌구나. 그러하다면 이제 떠나서 살기가 적당한 시점이 되었다’ 그렇게 본 것입니다. 그리고는 먼저 선택권을 준 삼촌의 의견처럼 자기가 선택권을 행사하려고 눈을 들고서는 그 앞에 펼쳐진 요단의 들녁 이곳 저곳을 둘러봅니다.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는 삼촌이 고맙다는 생각입니다. ‘정말 우리 삼촌은 좋은 사람이야 마음이 넓기가 태평양만큼이나 되는 것 같아’ 그럽니다.

이런 현상은 어디에서나 다 마찬가지이며 오늘날 교회도 동일합니다. 사람들이란 여러 가지 여러 보양들입니다. 삶의 모습들이 서로 다르고, 나이도 다르고, 서로의 가치관도 다르고, 생활의 패턴들도 다르고 정말로 가지가지가 서로 다른 사람들의 모여 지내는 곳이 교회입니다. 정말 우리 문제로는 주차공간도 부족하고 같이 앉아서 차 마시는 공간도 부족하고 온갖 것들이 다 불편하기 쉬운 우리들의 공간들입니다. 오래 믿은 사람들도 많고 지금 막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한 성도들은 그래도 오래 믿은 집사들이나 장로, 권사, 목회자들은 무엇이 달라도 다르겠지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오래된 분들은 막 시작한 분들은 당연히 조용히 배우면서 시작해야 하리라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다르고 생각의 방향들이 다릅니다. 그러니 당연히 갈등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는 
10절,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이 때에 롯은 자기가 먼저 삼촌에게 고맙다고 생각하기 전에, 아니 눈을 들어 요단지역을 바라보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들이 있었는데 그걸 접었습니다. 그리고 눈을 들어서 그 길을 바라 봅니다.

지금까지 롯은 아브람을 그대로 따르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란에서 가나안을 따라서 왔습니다. 가나안에서 흉년이 들자 ‘우리 애굽으로 가자’고 말하는 삼촌을 따라서 그대로 애굽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애굽에서 다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제 다시 가나안으로 가자라는 삼촌을 따라서 이제 가나안 입구 소알 땅까지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더 이상 계속하여 따라 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 듯합니다. 그래서 “나를 떠나가라”는 삼촌의 말에 그대로 따르기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제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이 되었습니다. 롯은 이제는 떠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인생은 언제나 선택입니다. 롯도 지금까지는 삼촌과 같이 따라왔고 서로가 같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선택해야 할 시기입니다. 떠날 것인가 말 것인가 이제 선택할 시기입니다. 사람은 늘 선택의 기로에 서기 마련입니다. 어떤 회사에 들어갈 것인가, 누구를 만날 것인가, 누구와 결혼할 것인가, 무얼 먹을까 무얼 마실까 늘 선택의 기로에 서기 마련입니다. 그 시점에 롯은 눈을 들어서 멀리 가나안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선택을 위한 바라봄입니다.

중요한 선택의 시점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실까 그걸 생각하고 그걸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기도하고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지혜를 구하고 도우심을 요청하여야 합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내 경험이나 내 생각이나 내 것이 앞서면 그는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중심의 사람입니다. 여러분들과 저는 인생의 삶의 중요한 고비에서 하나님께 엎드리고 기도하고 아멘하고 그리고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2. 선택의 순간
10절,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이제 두 사람은 서로 나눠지는 갈림길에 섰습니다. 이 시점에서 롯이 눈을 들어서 요단강 주변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자기가 선 곳에서 저 소알까지는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의 동산 같고 마치 얼마 전에 지나온 목축하기에 너무나 좋았고 먹을 양식이 풍부하였던 그 기름지고 아름다웠던 애굽 땅과 같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소알 땅이면, 이것이면 풍족하고 여기면 얼마든지 터 잡고 살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수많은 가족들과 가죽들을 이끌고 고생하며 왔다 갔다 이사 다닐 걱정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믿음은 어디 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장 눈 앞의 이 소돔 고모라가 있는 이 좋은 소알 땅은 온 땅에 물이 넉넉하였습니다. 목축하기에 너무나 알맞아 보였습니다. 마치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습니다.
 
장사하는 사람에게는 장사의 목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에 아무리 좋은 가게는 차려 두어도, 아무리 싸게 판다고 세일을 선포하고 전단지를 돌리고 광고를 하여도 사람들이 잘 찾아오지를 않습니다. 목축하는 사람들에게도 목초지가 풍성한 땅이 너무나 중요하고 너무나 필요한 것입니다. 물이 넉넉하고 풀이 많으면 아무런 걱정거리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물과 풀이 풍족한 땅을 조카에게 그대로 양보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카 롯은 그게 마음에 흡족하였던 것 같습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어떻게 아브람이 이렇게 양보를 할 수가 있었을까요? 몇가지의 해석이 가능합니다.
우선, 롯은 조카이기 때문입니다. 조카인 롯이 지금까지 아브람을 잘 따라왔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어른으로서 양보한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눈에 보이는 조건보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그 가나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하나님의 그 보장된 약속입니다. 아브람은 지금 눈 앞에 펼쳐진 그 요단 주위의 아름다움보다 가나안의 그 약속, 넉넉히 주리라는 그 약속 그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푸르른 그 목초지를 조카에게 양보하는 여유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하나님의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굳게 믿었습니다. 복이 되고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그 엄청난 약속이 있었기에 지금 눈 앞에 보이는 문제 이건 훨씬 적은 것들이요 소소한 것들입니다. 그러니 이 정도는 충분히 이기고 넘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소알, 그 너머에 엄청난 약속의 땅 가나안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브람에게는 그 가나안을 보는 믿음의 눈이 있었습니다. 지금을 넘어서 있는 약속, 그걸 붙잡은 것입니다. 눈 앞의 것보다 보이지 않는 저 멀리의 그 약속, 그러므로 충분히 이기고 극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이 귀에 아무소리 아니 들려도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리라

하나님은 기도하는 아브람, 하나님 앞에서 이제는 더 이상 실수하지 않으려고, 제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그 아브람을 지켜주시고 그 땅을 보호하셨습니다. 이제 아브람은 더 이상, 하나님의 약속을 못 믿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적어도 아브람에게는 애굽에서의 고통은 충분한 수업료를 지불하고 경험한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고통을 단순히 경험으로만 지나면 안됩니다. 그 고통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를 발견하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왜 이러한 고난이 나에게 왔을까?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 때문에 이러한 고난의 과정을 통과하게 하실까, 하나님 앞에서 그걸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답변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이 사람들입니다.

아브람은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적어도 조카와 목초지를 두고 싸우라고 이곳으로 부르신 하나님은 아니심을 알았습니다. 목초지의 선택권보다 더 중요한 그것, 그것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아브람은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먹고 사는 이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여기서 목양을 잘하고 그리고 잘 먹고 잘 살아라 그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아브람과 조카 롯, 그들은 같이 하란에서 살았는데 그곳에서도 얼마든지 싸울 수가 있었는데 여기까지 불러놓고 여기서 싸워라 그건 아닌 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담대히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고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리라 라고 담대하게 양보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선택의 순간 롯은 믿음으로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계산하며 선택하였습니다. 롯과 우리는 얼마나 다른 사람들입니까? 혹시 우리는 너무 계산적이지 않습니까? 너무나 하나하나 따지고 계산하며 주산알을 놓고 그러지 않습니까? 요즘 결혼하는 사람들은 깊이 있게 사람을 보려고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너무 앞에 나타난 것들만 보고 계산합니다. 결혼하겠다는 사람들이 상대편을 만나고 대화해 보고 그리고 선택하여야 하지 않습니까? 주고 받는 사진 한 장 보고 선을 볼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게 일반적인 듯합니다. 결혼을 하면서도 아이는 하나만 낳기로 결정하고 결혼하는 것은 너무나 자기 중심의 이기주의는 아닙니까? 매사에 우리는 너무나 계산적입니다.   

아브람은 하란에서 자기를 부르신 그 하나님, 나를 향한 그분의 계획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 큰 것을 가지기 위하여 이 작은 것, 목초지쯤은 조카에게 충분히 양보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네가 우하면 나는 죄하고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리라”라고 멋지게 양보하는 통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바라보는 하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물이 많은 이 소알땅, 양들을 먹일 풀이 풍부한 이 소알 땅을 바라만 보고 결정하지 마십시오, 이 눈에 안 보여도, 이 귀에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헤브론, 그 헤브론이 있는 가나안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시선은 그곳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곳을 희망하십시오. 그곳을 선택하십시오. 소알과 헤브론, 지금 눈 앞의 소알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저 멀리 헤브론을 보고 가나안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평화는 지금보다, 바로 눈 앞의 것보다 저 멀리 보고 저 멀리에 투자하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3. 평화를 위한 댓가
11절,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마침내 롯은 눈 앞의 초지 소돔 고모라를 선택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무런 대가도 없이 소돔 고모라 땅을 차지합니다. 우선 눈에 보이는 대로 푸른 초지 많은 물가를 선택하였습니다. 그 소알 땅이 마치 하나님이 가라고 보내신 준비하신 바로 그 땅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선택이 실패의 길로 들어 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롯은 이성적인 사람이요 현실적인 사람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안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분명 하나님을 믿은 사람이지만 그러나 자기의 이성의 범위 안에서 믿었습니다. 이성을 벗어나는 일을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모험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선택의 기회에서 얼른 이성적 판단으로 목초지가 풍부하였던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이성적 판단으로는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동산 같았고 애굽의 땅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티그리스 강, 유브라데스 강 등, 네 강이 흘러서 내려오던 여호와의 동산 메소포타미야, 나일강이 있어 목양이나 농사가 풍성하였던 그 애굽, 롯이 보기에는 바로 눈 앞에 펼쳐진 이 소돔과 고모라는 바로 그런 땅이라고 판단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성적 판단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그렇게 선택하였으면 잘 살아야 했습니다. 분명히 잘 살아가야 하였습니다. 그런데 평화를 위하여 믿음을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데 조카 롯에게는 그게 없었습니다. 평화를 위한 대가가 없었습니다. 나에게 주어지는 평화를 지키고 유지하려면 반드시 그에 맞는 대가가 나에게서 나와야 하였습니다. 그냥 얻기에만 급급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비극이 오고 말았습니다. 푸른 초장은 그냥 내 손에 고대로 다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걸 차지하려면 거기에 알맞은 대가가 반드시 필요하였습니다.

내 앞에 어떤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는 한 번 쯤은 깊이 생각하고 기도하고 그리고 행동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적어도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내가 행동해야 할 일들이 떠오르게 될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하더러도 내가 그 일에 맞는 사람이지 아닌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하여 나는 할 일이 무엇인지, 내가 그걸 해 낼 수 있을지 없을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이성적 판단으로 그저 좋다, 내게 손해나지 않는다, 나에게 유익이 되겠다, 그래서 그대로 덤비기만 한다면 실패하기 쉽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1,12절,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소돔 고모라라는 평온의 초목지를 선택하여 간 롯에게 엄청난 위기가 닥쳤습니다. 바벨론이 생기기 전, 그곳 엘람이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엘람 왕 그돌라오멜은 아주 큰 왕이었습니다. 그는 가나안까지 통치권 아래에 둔 큰 왕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매년 그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12년을 지냈는데 그만 배반하였고 이를 분하게 여긴 그돌라오멜이 이웃 4왕과 연합하여 소돔고모라를 침공하여 온 것입니다. 마침내 그들 4연합군은 소돔 고모라에 거주하던 아브람의 조카 롯과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끌고 가 버렸습니다.

지금까지 소돔과 고모라가 푸른 목초지와 물이 풍부한 요단 땅을 유지하고 안전하게 살았던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하면 그들이 평화의 비용을 지불하였기 때문입니다.

4절, “이들이 십이 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소돔 고모라는 그돌라오멜에게 일정의 평화의 비용인 조공을 바쳐왔습니다. 그 비용이 중요합니다. 12년간 그들이 바치면서 나라가 조용하니까 이제 이 평화는 유지되려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평화가 마치 공짜라는 생각을 하고는 바치던 조공을 거둡니다. 그러나 그들이 한 가지 잘못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평화는 결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입니다. 평화는 공짜로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고 그 결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소돔 고모라가 비용을 중단하자마자 바로 전쟁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엄청난 혼란이 시작되었습니다.

롯이나 소돔 고모라 사람들이 모르고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들이 누리는 평화가 저절로 주어지는 공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잘 될 거야, 그러다가 난리가 난 것입니다. 사람들이 잡혀갑니다. 엄청난 재물까지 다 노략당하고 말았습니다. 왜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지불을 멈추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누리는 이 평화를 잘 유지하기 하여선 반드시 유지비용이 필요합니다.

이 비보 소식을 아브람이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조카가 잡혀간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아브람에게로 떨어졌습니다. 소돔고모라 선택은 롯이 하였지만 그러나 그 롯을 지키고 세워가는 일에 아브람은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골육이라고 말하였던 아브람, 하란에서부터 그를 데리고 내려온 아브람, 이제 아브람은 그 조카를 찾아와서 평화의 상태로 만들기 위하여 들 경비를 계산하였습니다. 평화를 되찾기 위하여, 사랑하는 조카를 데려오기 위하여 거기에 들어갈 평화를 위한 경비 계산을 하였습니다. 나와 언약을 맺은 형제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나를 필요로 한다는 그 한 가지 사실만을 이유로 그는 그 전쟁에 뛰어 들었습니다. 평화를 위한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려고 나섰습니다.

14-16절,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기르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

집에서 기른 318명으로 조카를 찾기 위하여 4연합군을 침공합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개입과 도우심으로 그들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승리하여 조카를 찾고 빼앗겼던 재물들을 찾아왔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사람의 수나 병거의 수로 결정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조카를 찾아오는 그 엄청난 평화의 비용, 아브람은 이렇게 평화의 비용을 지불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서는 그에 알맞은 평화유지 비용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려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습니다.  베드로사도의 말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2:24).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화평을 주시려고 십자가라는 평화의 대가를 지불하신 주님이십니다. 최고로 값진 대가를 지불하셨고 그리고 우리는 그 댓가로 평화를 누리며 사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직장에 나가서 돈을 벌어오는 것만 돈버는 것이 아닙니다. 집에서 아무런 사고가 나지 않도록 아이들을 잘 돌보는 일이 평화를 지키는 힘입니다. 자녀들이 잘 커주고 잘 자라는 것이 평화를 지키는 힘입니다. 지나가는 도로에 아무런 사고가 나지 아니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려면 자동차를 안전하게 몰아야 합니다. 지나가는 버스도 잘 정비하여야 하고 지나친 폐타이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하며 운전자도 졸지 아니하고 제대로 운전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여기까지 왔다면 누군가가 엄청나게 이 평화 유지를 위하여 댓가를 지불하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집안에서 엄마가 힘들게 아이들을 돌보고 키우고 가르치니까 아이들이 잘 자라고 잘 배우고 커 갑니다. 그 아이들보는 일, 그게 비용이 되어서 자녀들이 무럭무럭 자랍니다. 엄마의 그런 비용이 없으면 자녀들이 제대로 자라나지를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엄청난 가정 세우는 비용이 지불되어 갈 것입니다. 직장에 나간 아빠나 엄마가 열심히 일을 하여서 돈을 법니다. 그 댓가가 가정을 세우고 지켜 갑니다. 나라를 지키는 산업의 현장의 사람들이 있기에 그 나라경제가 성장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 어두운 곳에서 이 사회를 지키기 위하여 수고하는 경찰들, 이런 분들이 다 평화를 지키는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분들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기 위하여 내게 주어진 그 일들을 다 하여야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주어진 일들을 다할 뿐 아니라 역으로 하고 싶은 말들도 때로는 억지로라도 줄여 나가야 합니다. 참으면서 세워가야 합니다. 인내하면서 양보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평화가 유지될 것입니다. 평화의 유지비용이 필요합니다. 교회를 위하여, 가정을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평화의 비용을 잘 지불하시기 바랍니다.

골1:24절,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내 몸에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한 고난으로 채우는 일이 교회를 위한 비용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내 몸에 채워야 제대로 된 댓가가 지불됩니다. 그럴 때 교회가 성장되고 그리스도의 몸이 제대로 유지되고 바르게 성장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렇게 비용을 지불하면서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오늘을 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맺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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