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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대예배 설교
Sun Dec 04 2016 02:00:00 GMT+0000 (Coordinated Universal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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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예수님의 시선
본문 :
본문 : 요9:1-7
남미의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국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동상이 하나 서 있다고 합니다. 아르헨티나와 칠레는 국경을 대하고 있어서 늘 전쟁의 위험이 있어서 평화의 상징인 예수상을 세우기로 합의를 하였습니다. 그 동상이 서 있는 동안은 두 나라가 서로 전쟁이 없이 우호 관계를 유지하자고 합의를 하고 동상을 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동상으로 말미암아 두 나라 사이에 오히려 전쟁이 일어날 상황이 되었습니다. 동상이 거의 완성되어 가고 있을 때였는데 칠레의 한 사람이 지적하기를 그 동상의 예수님은 칠레에다 등을 돌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 이야기를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동상의 전면은 아르헨티나를 향했고 뒷면은 칠레 쪽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칠레 사람들의 마음을 대단히 상하게 하고 자극하였는데 동상을 세우는 일은 칠레를 무시한 처사라고 판단하였습니다. 칠레 사람들의 감정은 점점 거칠어지고 그것은 곧 폭발할 지경이 되었는데 바로 그때 한 기자가 신문에 실은 글 때문에 그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습니다. 그 신문의 글은 말하기를 예수님의 얼굴이 아르헨티나를 향하고 서 계시는 이유는 아르헨티나가 칠레보다 예수님의 감시, 즉 감독을 더 필요로 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신문의 글은 전체 칠레 사람들의 감정을 즉시 무마시키고 전쟁은 넘어가고 국가간의 엄청난 마찰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한 사건이라도 바라보는 시선의 방향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해석을 내리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말에 같은 사건이라도 안방에서 듣는 말이 다르고 부엌에서 듣는 말이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동일한 사건이라도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해석이 다르고 고용자와 고용인의 해석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사는 데는 이런 일들이 수도 없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은 정상인 일이요 현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입장이 별로 다르지 아니한 데도 동일사건에서 해석이 다르고 평가가 다르면 곤란할 경우가 많습니다. 분명히 같이 인식하고 같은 해석을 공유하여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여 의견이 갈리고 다르고 하다면 그건 분명한 문제가 아닐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런 내용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과 제자들이 같이 길을 가다가 맹인된 사람이 구걸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제자들이 그 사람을 보기에는 무척이나 불쌍하고 초라해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도대체 이 소경이요 거지가 된 이 사람, 이가 이렇게 된 원인이 누구 때문입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통하여 오늘 우리가 발견하고 터득하여야 할 중요한 내용이 잇습니다. 우리는 그걸 발견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이 눈먼 자, 게다가 남에게 도움을 구해야 하는 걸인, 이 사람에 대한 관심, 얼마나 불편할까? 얼마나 생활이 어려울까? 아니면 내가 이 사람을 어떻게 도울까라는 생각들은 전혀 없고 단지 이 사람의 이렇게 된 것, 즉 보이지 않는 맹인으로 탄생한 것이 누구의 죄인가라는 데만 관심을 가지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사람들의 관심은 환자가 아닙니다. 그 환자를 고치고 말고가 아닙니다. 그저 이 사람이 이렇게 된 건 누구의 탓인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라는 데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이게 세상 사람들의 현실적인 모습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책임을 묻고 팔자를 논하고 그럽니다. 그러나 크리스찬들은 단순히 이렇게만 살아서는 안됩니다. 사람은 생각을 어떻게 가지느냐가 아주 중요합니다.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시선이 아주 중요합니다. 생각과 시선이 인생을 사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사건을 해석하는 사고의 틀입니다. 그리고 시선은 사건을 해석하는 도구입니다. 우리는 이제 본문의 소경 걸인에 대한 대화에서 예수님께서 가지신 시선, 예수님의 사건해석방법을 찾고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1. 자신의 탓이라고 한탄하는 사람들입니다.
1,2절,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제자들의 질문입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즉 ‘주님, 병자 그 사람 자기 죄 때문이지요. 그렇지요?’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실제로 이런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이 모든 불행한 일들은 분명 나 때문이라는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내 가정이, 내 주위가, 내 국가가 이렇게 된 것은 다 내가 죄가 많아서 그렇고 내가 기도하지 않았고 내가 잘못하였고 내가 못 났고 그래서 다 내 탓, 내 잘못으로 인하여 이렇게 어렵고 힘든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라는 생각들입니다. 모든 게 다 내 탓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한탄하고 그래서 가슴을 치고 그럽니다. 이런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생각이 언제나 우울합니다. 모든 것들이 내 잘못이요 내 탓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책감에 젖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내가 죽일 놈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책망하고 한탄하고 가슴을 칩니다. 무릎을 꿇고 회개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다 보니 늘 자책하고 속상해하기 쉽습니다. 가슴이 멍들고 생각은 병이 들어 갑니다. 남들보다 감사나 평안이나 기쁨이 적습니다. 나 때문이요 내 잘못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느 날 평안이 있을 수가 없고 늘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병원에 가서 입원하여 고생하고 있는 환자들을 보면 대개의 경우는 환자 자신들의 탓으로 일어난 일들 때문에 입원한 경우가 많습니다. 환자가 자기 몸에 대하여 건강관리를 잘못하였고 일상의 생활에서 부주의하였고 생각들을 잘못 가졌었고 그래서 일어난 결과의 불행들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내 탓입니다가 대개입니다. 자녀들이 뭐가 제대로 생각대로 뜻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내 탓입니다. 내개 잘못 가르쳤고 내가 기도를 적게 하였고 내가 정성이 부족하였고 그럽니다. 분명히 그럴 수도 있습니다. 내 탓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모든 잘못이 다 내 탓이요 내 잘못이요 내 불찰이다 그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나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특히 나와 멀리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문제가 일어나기만 하면 내 탓입니다라고 가슴을 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나라가 어려워도 내 탓이요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내 탓이며 주위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다 내 탓이라고 가슴을 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이런 사고 일변도로 생각하는 것은 건전한 사고방식이 아닐 수 있습니다. 어떤 사건이나 사고들은 분명 나의 잘못도 포함이 될 수가 있겠지만 그러나 모든 것들이 다 내 잘못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다간 잘못하면 정신적인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잘못하면 심리적으로 이상해지고 심한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되고 말게 됩니다.
어제 강화도에 가서 항존식 부부 세미나를 하고 왔습니다. 돌아오다가 가게이름이 **네 가게라는 간판이 눈에 띄어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를 세우고 들어갔더니 첫눈에 이상하게 보이는 이십대 초반의 젊은 청년이 나를 째려보면서 뭐라고 뭐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인 아주머니에게 왜 그런지를 물었더니 22세 아들인데 나면서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 배속에서 거꾸로 선 아이를 모르고 끌어내다가 문제가 생겼는데 또 목에 탯줄이 걸린 것을 모르고 힘을 줘서 끌어 내어서 숨을 못 쉬고 산소공급이 되지 않아 뇌를 다쳤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정말 누구의 탓입니까? 청년이 그렇게 된 것은 정말, 자신의 죄도 아니고 누구의 죄도 아닌데 정말 누구의 탓입니까? 병원에서의 조그만 잘못이 그런 결과는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건 과연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지나치게 자신의 탓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주님은 자유함을 주시는 구주이십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자유함을 얻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다른 사람들의 탓이라고 돌리는 사람들입니다.
1,2절,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사람들의 관심은 이 눈먼 자에 대한 관심, 얼마나 불편할까? 얼마나 생활이 어려울까? 아니면 내가 이 사람을 어떻게 도울까라는 생각들은 없고 단지 이 사람의 이렇게 된 것, 즉 보이지 않는 맹인으로 탄생한 것이 누구의 죄인가라는 데만 관심을 가지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사람들의 관심은 환자가 아닙니다. 고치고 말고가 아닙니다. 그저 누구의 탓인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라는 데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질문을 합니다. 이게 세상 사람들의 현실적인 모습들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물었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이런 질문은 정말 그 밑바탕에 무언가를 깔고 하는 질문입니다. 분명히 부모의 잘못이나 자기 자신의 잘못이나 잘못이 깔려 있어서 이렇게 맹인으로 태어났다는 전제된 질문입니다. 그래서 그 바탕위에서 예수님께 던지는 질문입니다.
질문을 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한가지의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맹인으로 태어난 것은 분명히 죄 때문이다, 죄의 결과야, 분명히 죄가 많아서 그런 거야 라는 생각들입니다. 죄가 없다면 절대로 이렇게 태어날 수가 없고 이럴 이유가 없지라는 생각들입니다. 죄로 인하여 나면서부터 앞도 못보고 걸인이 되어서 이렇게 구걸하는 이 사람, 분명히 누구의 죄인지는 몰라도 죄로 인한 결과로 이렇게 불행하게 눈이 멀어서 벌 받아서 태어난 것이라는 자기 확신입니다.
무언가가 문제가 되면 자기는 피하고 돌아가고 마치 탁구공 넘기듯이 요리조리 넘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남들에게 그 탓을 돌리는 사람들입니다. 원인을 찾고 그 핑계를 찾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이웃에게 돌리고 남들에게 돌립니다. 분명한 한가지는 나는 잘못이 없고 나에게는 그런 잘못도 이유도 원인이 없습니다. 이웃 잘못이고 남들 탓입니다. 그래서 문제이고 그렇게 문제가 된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이런 사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습니다. 모든 사건이나 사고는 다 책임을 져야 하는데 분명한 것은 나는 책임자가 아닙니다. 이웃이요 저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반드시 희생양을 찾습니다. 핑퐁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제외합니다. 넘기면 일단 내 마음이 편해집니다. 내가 아니라고 확신하면 그리고 나면 나는 홀가분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나를 제외한 그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라는 질문입니다.
3.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다고 믿는 믿음입니다.
3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의 대답은 명확하였습니다. 눈이 먼 이 사람의 잘못이나 이 사람의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대답입니다. 이 사람이 눈먼 상태로 태어난 것은 단지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뜻이 있어서 이가 맹인으로 태어났다는 말씀입니다. 원인이 뭐요? 하나님께 있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이 맹인의 맹인 됨이 이 맹인 자신이나 그의 부모에게로 돌리는데 반하여 예수님은 아니야 그들이 아니야, 바로 하나님, 하나님이셔라는 말씀입니다. 즉 원인을 사람들에게로 돌리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 돌리는 대답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