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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 Feb 12 2017 02:00:00 GMT+0000 (Coordinated Universal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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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신앙과 불신앙의 차이
본문 :
본문 : 왕상22:5-9
동 시대, 같은 환경에서 살았어도 심판에 대하여서 확연하게 다르게 평가를 받는 장면이 바로 마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말씀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고 유심히 보아야 하는 것은 무엇이 이렇게 오른 편의 양이 되고 무엇이 이렇게 왼편의 염소가 되게 하였는지에 대한 분석입니다. 무엇의 차이입니까? 어떤 차이란 말입니까? 가만히 보면 그들의 반응의 문제입니다. 오른편의 사람이나 왼편의 사람이나 다 똑 같이 헐벗은 사람을 보았고 똑 같이 목 마른 자들을 보았고 똑 같이 옥에 갇힌 자의 소식을 들었고 똑 같이 살고 보았지만 그러나 그들에 대한 반응이 믿음의 반응인가 믿음의 반응이 아닌가의 차이에서 갈려진 것입니다. 즉 신앙과 불신앙의 차이에서 나눠졌다, 갈렸다 그런 의미입니다. 이렇게 신앙과 불신앙의 차이는 크고 큽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솔로몬 왕 이후로 그 아들 르호보암 때에 단일왕국이었던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분열이 되어서 남왕국은 르호보암을 중심으로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여 유다나라가 되고 북왕국은 여로보암을 왕으로 하여 사마리아에 이스라엘 나라를 건국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유다 제 4대왕으로 여호사밧이 왕위에 올랐을 때에는 북왕국 이스라엘에는 제7대 아합이 왕으로 올라서 3년째 치리하고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사돈간이었는데 여호사밧의 며느리가 아합 왕의 딸이었습니다. 사돈간이었던 이 두 왕은 개인적으로도 가까울 뿐 아니라 그 시기에는 국가 간에도 동맹을 맺어서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던 특수한 시기입니다.
그러나 열왕기나 역대기를 보면 여호사밧 왕과 아합 왕은 아주 다른 칼라의 삶을 살았고 전혀 다른 왕의 일을 하여서 역사는 그 두 왕을 대하여 전혀 다른 상반된 평가를 내렸고 하나님도 다르게 평가를 하셨습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은 아주 훌륭한 왕으로 평가하는데 반하여 북왕국의 아합 왕은 아주 타락한 아합 왕조의 우두머리이고 악한 왕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신기하다할 만큼 서로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는 왕들입니다. 왜 그럴까요? 동시대에 같이 남북 나라의 왕의 일을 한 사람들인데, 사돈지간인데 왜 이렇게 사람들에게도 다른 평가를 받고, 하나님께도 다른 평가를 받게 된 것입니까? 무엇이 사람들을 이렇게 나누게 되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너 나없이 이웃이나 하나님께 좋은 평을 받고 인정을 받고 싶어합니다. 나쁜 평을 받거나 실패자라는 평을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다 칭찬받고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이게 인지상정입니다.
역사에서나 사람들에게서나 하나님께나 좋은 평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전혀 생각 밖의 홀대의 박한 평가를 받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잘못된 평가를 받는 사람 그 자신으로서는 억울하고 아주 속상하겠지요? 자기는 그렇지 않은데 왜 많은 사람들이 그런 평가를 내리느냐고 항변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마치 그렇다고 버선목을 뒤집듯 그렇게 자기의 속마음을 다 환하게 까서 보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 말 못하는 사람 냉가슴 앓듯이 속앓이 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 우리들의 인생살이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이웃에게 좋은 평들을 받고 하나님으로 부터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그런 평들을 받으면서 살아갑니까? 아니면 반대로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는 평가를 받을 것 같습니까?
그 한 사건에 대한 해석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왕상 20장을 보면 아람 왕 벤하닷이 북왕국 이스라엘에 쳐들어 왔다가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하여 참담한 패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부친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도시들을 모두 돌려주기로 약속하고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풀려납니다. 그 중에 이스라엘의 요충지요 전략거점인 길르앗 라못이란 지역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났는데도 아람 왕은 그 지역들을 이스라엘에게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속을 부글부글 끓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때마침 사돈인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이스라엘 왕을 방문하였습니다. 북왕국 아합 왕은 여호사밧 왕의 도움을 요청하고 자연스럽게 사돈끼리 힘을 모아 남북연합군을 조직하였고 함께 길르앗 라못을 탈환하려고 나서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로 이런 배경을 갖고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신앙과 불신앙이 나눠져서 나타납니다.
1. 만남이 중요합니다.
2절, “제 삼년에 유다 왕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 내려가매”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이스라엘의 아합 왕을 만나러 내려갔습니다. 남북을 대표하는 두 정상이 서로 만난 것입니다. 아합 왕은 사돈인 여호사밧 왕을 만나자 마자 아람에게 빼앗겼던 중요한 지역이요 요새인 요단강 동편의 고토 길르앗 라못을 빼앗기 위한 전쟁을 함께할 것을 제안합니다. 아마도 아합으로서는 그 일이 이스라엘 나라의 자존심이요 왕의 채면이 걸린 일이요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빼앗긴 내 땅을 다시 찾자는 것은 한 나라의 왕으로서는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요 이미 돌려받기로 약속하고 아람의 벤하닷 왕을 풀어 주었는데 그런 땅도 돌려받지 못하고 있으니 왕으로서의 체면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이겠지요.
그러나 이 일로 인하여 결국 아합 왕은 죽게 됩니다. 악한 왕이었던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 왕은 결국 전쟁에 투입되고 아람과의 치열한 전투 중에서 적군이 쏜 활에 맞아 전사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반드시 짚고 넘어갈 이야기는 사람은 누구를 만나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하려고 시도하느냐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만나면서 무얼 생각합니까? 사람은 상대를 만나면서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아합 왕은 사돈 아하시야 왕을 만나서 힘께 전쟁에 나가자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내 채면이 이게 말이 아니예요, 왕의 입장이 문제가 되어요, 그래서 ‘사돈 내 채면 좀 세워주세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를 만나지 않았으면 아직도 조용히 생각만 하고 있었을 터인데 그를 만나자마자 연합하여 전투하기로 제안을 한 것입니다.
4절, “당신은 나와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싸우시겠느뇨?”
여기서 아합 왕의 잘못은 상대를 만나면 먼저 그 상대를 이용하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전투하자고 말합니다. 함께 연합군을 만들고 길르앗 라못을 빼앗자고 요청합니다. 상대가 내게 어떻게 유익을 줄까? 내가 무슨 일을 도움 줄까를 생각하면서 만나면 좋은데 그 상대편을 이용하려고만 들면 그건 정말 피곤하게 됩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혹시 도움을 주지 않을까, 저 사람이 혹시 내 사업에 고객이 되지 않을까, 저 사람이 혹시 나에게 밥이 되지 않을까 이렇게만 생각하고 사람을 대하기가 쉽다는 말입니다. 아합의 그런 생각이 전쟁하게 하였고 그리고 그 전쟁에서 전사하게 만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람은 만남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마음으로 상대를 만나느냐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상대방을 나에게 맞추려고 하면 인간관계에서 실패합니다. 특히나 상대편을 이용하려는 마음을 갖고 그를 대하면 안 됩니다. 인간관계에 실패하면 그 사람의 인생도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내 유익중심으로 생각하고 인간관계를 맺으면 실패하게 되는 법입니다. 혹 남보다 좀 못 가졌고 남보다 좀 덜 났어도 인간관계에서 성공하면 그 인생은 성공하기가 쉽습니다. 어떤 관계가 바람직한 관계냐 하면 상대의 유익을 생각하고 그에게 도움을 주려고 생각하고 관계를 맺으면 성공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상생하는 법칙입니다. 윈윈(Win-Win)법칙이지요. 너도 살고 나도 살고, 나도 살고 너도 살고, 그래서 윈윈입니다. 이것이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생활의 원리입니다.
아합 왕은 여호사밧을 만나서 자신의 일에 상대를 끌어 들이고 이용하려고 하였습니다. 이게 피곤한 일입니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피곤한 일은 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상대를 이용하려는 자세입니다. 잘못된 인간관계입니다. 그러나 좋은 관계는 상대의 부족한 점을 메우려 하고 그에게 도움을 주려는 자세입니다. 저 사람의 부족한 부분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그걸 내가 메워 줘야지’ 그렇게만 생각하면 정말 좋은 관계를 맺을 수가 있는데 이게 쉽지 아니합니다. 또 인간관계에서 상대의 약점을 자꾸 본다든지, 상대의 실수를 생각하고 자꾸 부각시키든지 하면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나를 만난 그 사람이 행복하게 된다면 그 사람도 행복해지지만 사실은 내가 훨씬 더 행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나를 만나서 사람들이 행복해지고, 에너지를 보충하고, 힘이 없었던 사람이 용기를 가지고 살아나고 인생에서 성공하게 되도록 만들어 주는 그 사람, 그런 사람은 남도 행복하게 하고 또 자기의 인생도 행복해질 것입니다. 적어도 내 목적달성을 위하여 상대를 이용하려고 하면 그건 아주 나쁜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되지 읺도록 주의하여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무언가 작더라고 유익을 주고 그를 세워주기를 원하여야 합니다. 누구를 만나느냐도 중요하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려는 생각은 더욱 귀합니다.
2.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물어 보소서”
5절, “여호사밧이 또 이스라엘의 왕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물어 보소서”
아합 왕의 제안에 대하여 여호사밧 왕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였습니다. 기도해 보겠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의 대답은 우리가 전쟁에 나가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하나님께 진지하게 물어 보자고 말합니다. 여호사밧 왕의 이런 의견은 믿음의 사람으로 정말 온전한 의견이었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질 바람직한 자세였습니다. 사람은 위기를 맞이하거나 아주 중요한 때에 어디에, 누구에게 도움을 구하느냐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도움을 어디에다 구하느냐에 따라서 그의 인간됨도 나타나고 신앙됨됨이도 나타납니다. 신앙인에게서는 이것이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유다 왕을 만나서 곧 연합군 구성을 제안하는 이스라엘 왕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힘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군사력을 의지하고 그 조직된 힘을 통하여 일을 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입니다. 인본적인 자세의 전형적인 모습니다. 이것이 아합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았을 때도 그랬고 그 밭을 나물밭으로 삼는 것도 그의 전형적인 인본주의의 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아합의 제안을 받은 여호사밧 왕은 아주 지혜롭게 대처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에게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물어 보라고 가르칩니다. 행동하기 보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자는 생각입니다. 이게 믿음의 길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생각을 알아야 행동하겠다는 자세입니다. 그래야 나도 응하든지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그의 말을 보세요, 먼저 그는 “나는 당신과 일반이요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일반이요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일반이니이다”라고 상대를 편하게 대하여 줍니다. 얼마든지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따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한 식구요 한 형제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여호사밧 왕의 자세입니다. 정말 부러운 마음입니다. 아무나 대답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과 일반이요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일반이요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일반이니이다.” 아주 여유있고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넓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제안합니다.
기도해 보자고 하는 제안은 두가지 의미가 있는데 먼저는 하나님의 뜻을 묻자는 것이고 또 한가지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어떤 것도 나는 당신을 도울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신자에게는 먼저는 우리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뜻이 중요하고 제일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시급한 일을 만나더라도 먼저 할 일은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 일에 동참하든지 말든지 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는 먼저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고 그 뜻에 따라서 움직이고 실천하고 돕고 그러겠다는 자세입니다. 정말 멋진 여호사밧 왕입니다.
남에게서 어떤 중요한 제안을 받으면 우선 행동하고 보는 것은 대단히 미련한 일입니다. 그저 행동으로 나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대답을 행동으로 하는 행동파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대단히 위험한 삶의 패턴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에게 그런 것을 요청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도 누구에게 중요한 것을 요청했는데 그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라고만 말하면 서운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상대편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고 기도하게 여유를 주는 것이 대단히 바람직한 자세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의도와 하나님의 계획이란 없이 그저 내 생각대로 살면 습니다. 단지 나만 잇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건 정말 복잡합니다. 그렇게 되면 앞 뒤 순서가 바뀐 사람입니다. 이건 바로 내가복음입니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우선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순서를 제대로 세워가면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선 순위를 제시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6:33). 그리스도인들의 바람직한 자세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입니다. 참 어렵지만 나의 유익이나 나의 생각을 먼저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보다 먼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우선 묻는 생활의 패턴입니다. 그리고 답을 얻고 그리고 행동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실수가 줄이고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대로 살아나갈 있게 될 것입니다.
거절하지 못하여서 덜컹 ‘예스’로만 답하지 말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기도해 보겠습니다라는 여유를 갖도록 합시다. 나는 결단력이 있다고 보이기 위하여 그저 예스로만 대답만 하기만 하면 후에 후회할 일도 생깁니다.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의 길을 구하는 것이 바람직한 신앙적 자세입니다. 여호사밧 왕처럼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물어 보소서” 이렇게 믿음으로 반응하시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어떤 말에 귀를 기울이느냐가 중요합니다.
여호사밧의 요청에 따라 아합 왕은 이스라엘 지경 내의 선지자 400명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불러서 “내가 길르앗 라못에 가서 싸우랴 마라”라고 아람과 전쟁을 할까 말까의 출전에 대한 의사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 400의 선지자들은 동일하게 “주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들은 아합 왕의 혼합주의에 물들어 있었던 잘못된 선지자들이었습니다. 이른 바 사이비 가짜 선지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지도 하니하고 듣지도 아니하고 단지 왕에게 아부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아합 왕은 또 그런 아부하는 사람들을 곁에 두었던 왕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좋은 대로 듣고 해석하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좋은 말만 하도록 하였고 또 그렇게 하는 사람들을 좋아했고 그들을 사랑하였습니다. 그게 아합 왕의 불신앙이었습니다.
여호사밧 왕이 다시 “이외에 다른 선지자가 없나이까?”고 묻습니다. 그래서 미가야 선지자가 불려 나왔습니다. 그는 아합 왕에게 바른 소리를 하는 선지자입니다. 쓴소리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았고 특히 아합 왕의 눈치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를 본 아합이 단호하게 여호사밧에게 말합니다.
8절, “저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저를 미워하나이다.”
아합 왕은 미가야라는 선지자가 있긴 한데 자신은 그가 싫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듣기 거북하고 싫은 소리만 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인즉 아합 왕이 잘못하고 엉터리로 일하고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섡비가 미가야는 그런 아합 왕에게 길한 예언, 좋은 예언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합 왕은 자기에게 싫은 소리를 정말 잘 듣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게 아합 왕의 실수요 불신앙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딤후4:2,3절,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그러나 여러분, 신앙의 소리를 못 들으면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듣기에 좋은 소리가 아니며 우리 귀에 단 소리가 아니라 바른 소리요 신앙의 소리입니다. 나에게 들려주는 바른 소리, 비록 듣기에는 거북하더라도 올바른 소리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에게 들려오는 쓴소리를 듣기 싫어하고 귀를 막아 버리기가 다반사입니다. 바른 말은 잘 듣고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실패하기 제일 쉬운 인생은 소리를 듣되 골라서 듣는 사람입니다. 듣기 좋은 소리, 귀에 익은 소리, 칭찬해 주고 추켜세워 주고 아첨의 말을 하는 그런 말만 귀에 들어오고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못 듣는 사람들은 언제나 실패의 강가에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특히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상대방이 무슨 의도를 저 말을 하는지를 거의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싫어지면 안 만나려하고 피하게 되고 좋은 소리만 골라서 들으려 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이와 반대로 여호사밧 왕은 “이 외에 우리가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있지 아니하니이까?”고 물었습니다. 그가 보기로는 다른 선지자가 있다는 것이며 그를 불러내라는 말입니다. 우리도 보면 알잖아요? 이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또는 이 사람은 믿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알아야 합니다. 전혀 엉뚱한 곳을 긁고 있으면 그건 안 됩니다. 보면 알아야지요? 가끔 보면 그런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전혀 엉뚱한 일에 휘말려서 고생고생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안타까워요. 왜 그러냐? 영안이 흐려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와 뜻을 이해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다가 이건 전혀 아니다 싶으면 돌아가세요. 또 다른 길을 찾아보고 방법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그저 ‘모든 것이 다 좋다 좋은 게 좋지’ 그러면 안 됩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두 눈을 뜨고 보는 사람들입니다. 두 눈을 뜨고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하심을 바라보세요.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길을 찾고 바라보고 그리고 그 길로 다가 가세요. 그러면 하나님도 그 길을 열어 주십니다. 그래야 제대로 된 길이 열립니다. 선한 제대로 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신앙인의 세상 사는 방법이요 지혜롭게 세상을 살아가는 자세입니다.
:19-22절을 읽겠습니다.
“미가야가 가로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 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미가야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뜻은 그들 연합군의 출정을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건 바람직하지 아니하다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 편의 사람들을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늘을 가까이하는 사람들을 여러분들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남편이, 아내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까? 그들을 가까이 하시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말을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구의 말을 듣느냐에 신앙과 불신앙의 차이가 생기는 법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시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 축복합니다.
4. 신앙과 불신앙의 차이.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아니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찾고 묻는 불신앙의 사람 아합 왕은 결국 거짓 영에게 꼬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거짓말하는 영을 거짓 선지자의 입에 넣어주고 그 거짓에 좋은 말만 들으려하는 아합 왕이 당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거짓으로 꼬이고 거짓영에게 꼬임 당하고 그런 꼴입니다. 이게 세상 방법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 미가야 선지자의 빰을 야단하기 까지 하였습니다. 오히려 거짓이 더 큰 소리치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짓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진리인지 아닌지, 거짓인지 참인지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약 1:16-17절은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속해야지 마귀에게 속지 말아야 합니다. 어둠에 빠지고 속고 미치면 안 됩니다. 이단에 속으면 안 됩니다. 우리 주위에는 이러한 이단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거짓에 속거나 이단에 속으면 안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엉터리를 제대로 알고 걸러내고 자기도 피하고 이웃에게도 피하도록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속고 속으면 안 됩니다. 그야말로 신세를 망치는 그러한 속임수들은 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말입니다.
아합 왕은 결국 전사하였습니다. 그래도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인데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아서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그러면 조심하여야 하고 정신을 차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계속하여 불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다가 결국 전장에서 죽게 됩니다. 보세요? 왕복도 입지 아니하고 일부러 변장하여 출전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인간적인 방법을 쓰던 그는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연히 적진에서 쏜 화살에 맞았기 때문입니다. 불신앙의 결과였습니다. 참새 한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다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안 되는 일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아합과 같이 출전했던 여호사밧 왕은 아람군대에게 붙잡혀 아합왕으로 오인되어 위험에 빠졌으나 하나님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집니다. 그는 분명 악한 자를 도운 실수를 하였고 그에 대하여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믿음으로 대응한 왕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여호사밧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 결과 유다는 견고하여졌고 온 방백들과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배우며 국민들은 단합하였고 군대가 양성되어 든든한 국방력을 갖출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여호사밧왕에게 많은 예물을 드리며 왕을 따라 여호사밧은 엄청난 부를 누리면서도 교만하지 아니하며 믿음을 잘 지켜 가는 훌륭한 왕이 되었습니다. 대하19:13절은 그가 “왕이 아세라 목상들을 이 땅에서 없이하고 마음을 오로지하여 하나님을 찾음이니이다”고 나단 선지자에게 칭찬을 받습니다. “마음을 오로지 하여 하나님을 찾은”왕입니다. 신앙으로 반응하면서 인생의 사람을 살다가 간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의 사람입니까? 끝까지 인간적인 방법으로 변장하는 사람입니까? ‘내가 한번 세운 계획은 절대로 바꿀 수가 없어’ 그러면서 인간적인 생각으로 밀고 나가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오로지 하여 하나님을 따르고 섬기는 믿음의 사람입니까? 세상 방법 찾고 사람들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도움을 찾아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사람입니까? 자신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하나님의 뜻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내 계획이 그렇게 중요하거나 내 체면이 그렇게 소중하지 아니합니다. 그보다 우리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하고 더 귀하고 더 앞세워야 합니다. 사람들의 도움, 그건 모래성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우리를 살릴 수 있고 그 도움이 있어야 바른 자세입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면서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작은 반응이 엄청난 큰 결과로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조그만 대응이 전혀 다른 결과로 표현되기 쉽습니다. 신앙과 불신앙의 차이에서 비롯합니다.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판단하고, 믿음으로 행동하고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축복합니다.
5. 영향력을 주고 받으며
아합 왕의 뒤를 이어서 그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됩니다. 그도 자기 아버지와 똑 같았습니다. 자신이 다락에서 떨어져서 병이 들었을 때에 사자를 보내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하여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영향력입니다. 아버지 아합 왕에게서 보고 듣고 배운 대로 살았다가 불행하게도 실패하고 말았으니 아주 불행한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점하고 굿하는 무속인의 수가 30만 명을 넘는다고 합니다. 경기가 어려워져서 갈수록 점을 보러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고 이제 선거철이 되면 문전성시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철학관, 역술인, 무속인들이 우리들의 생활 깊숙하게 다가와 있습니다. 웃기는 것은 마두역 근처에 유명한 철학관이 있는데 우리 운세를 아무 정확하게 본다느니, 이처럼 정확하게 본 적이 없다느니 어쩌니 하는 말들이 이제는 교회의 집사들도 권사들도 교회의 모임에서 속삭이고 있다고 합니다. 솔깃하여 한번 제미삼아 가자 그러다가 꼬임에 빠져 가는데 하나님은 그걸 가장 싫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가 하면 은둔형 외톨이 또한 30만 명이나 되는 시대랍니다.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 방 안에 갇혀 지내는 '은둔형 외톨이' 30만 명이나 되는데 육박인데 국가의 대책은 전무한 실정입니다. 이들은 개인뿐만 아니라 가족 등 주변 사람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은둔형 외톨이들은 6개월 이상 최소한의 사회적 접촉도 없이 그저 집 안에만 머물러 있고, 진학이나 취업 등의 사회 참여활동을 할 수 없거나 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되는 원인은 진학과 취업 실패, 인간관계의 좌절로 인한 트라우마, 어린 시절 내재된 상처 등 다양합니다. 최근에는 1인 가구 증가와 고용불안의 사회 분위기도 은둔형 외톨이 형성에 큰 영향을 준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누가 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쳐야 합니까?
여호사밧은 아버지로부터 좋은 영향력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35세에 왕이 되어 25년간이나 유다를 다스렸습니다
43절, “여호사밧이 그 부친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며 돌이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는 아버지 아사의 영향을 잘 받았습니다. 그걸 보고 그대로 행하여서 좋은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좋은 정책을 펼쳤고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바르게 살았던 왕이었습니다(대하19:5-7). 그는 자기 뿐만 아니라 주위에도 많은 선한 영향을 주어서 나라의 재판장들에게 “여호와를 경외하고 충의와 성심으로 재판하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또한 이웃나라의 침략을 받았을 때는 성가대를 조직하여 찬양하며 승리하였고 마침내 그의 지도력으로 “여호사밧의 나라가 태평”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대하19:30).
여러분은 주위에서 어떤 영향을 주고 살아갑니까? 나사로 까닭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왔습니다. 세례요한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였습니다. 내 이웃에게 어떤 영향을 흘러 보내면서 살고 계십니까? 어떤 도움을 주면서 살아가고 어떤 평가를 받으면서 살아가고 계시는 분들입니까?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불신앙의 사람 아합 왕과 같이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믿음의 사람 여호사밧 왕과 같은 선한 영향력을 이웃에게 고루고루 미치며 살아가고 계시는 분이십니까?
맺음:
여러분은 어느 편에 서실 것입니까? 신앙인의 편에 서렵니까? 불신앙인의 편에 서렵니까? 여호사밧이 되시렵니까, 아니면 아합이 되시렵니까? 내가 가진 욕심 때문에 사람을 이용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아무리 어려워도 신앙의 편에 서야 합니다. 불신앙의 편을 기대고 기웃거리면 안 됩니다. 제대로 되는 것이 없어요. 된다고 해도 그건 잠간입니다. 영원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손해를 보더라고 영원을 선택하여야 합니다. 영원이 반드시 이깁니다. 진리가 이깁니다. 믿음이 이깁니다. 신앙인으로서 신앙의 편에 서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 편에 서고 우리는 교회 편에 서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으로 부터 욕을 먹으면 가나안 정탐군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옷을 찢고 나서서 말리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게 용기 있는 사람들의 모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고 그 회중들 앞에 서서 말리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편에 서고 믿음 편에 선 사람들입니다. 이게 신앙인입니다. 이게 믿음의 사람입니다. 다 안 된다고 할 때에 믿음으로 용기를 가지고 나서야 합니다. 다 부정적이라고 해도 하나님이 내편이면 된다고 말해야 합니다. 적어도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의 선택에 따라서 신앙인의 대표 여호사밧 왕의 길로 가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불신앙의 대표 아합 왕의 길로 갈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선택은 여러분들에게 달렸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앙의 사람을 도우셨고 그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편이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 편에 서십시요.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의 편에 서고 교회의 편에 서고 진리 편에 서세요. 그래야 삽니다. 그러한 개인이 살고 그러한 가정이 살고 그러한 회사가 살아나고 그런 국가가 살아납니다. 믿는 다는 것이 뭔가요?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 편에 서겠다는 사람들 아닙니까? 믿음으로 사는 사람, 신앙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