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양과 기도와 말씀이 살아있는 우리 교회
택한 백성, 선한 이웃, 귀한 교회
은혜의 물댄동산
주일 대예배 설교
Sun Sep 09 2018 02:00:00 GMT+0000 (Coordinated Universal Time)
주보 :
제목 :
제목 : 성도가 징계를 받을 때
본문 :
본문 : 삼하 12:15-23
성경을 읽다보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다윗 왕 이야기입니다. 다윗 왕은 여러 사람들에게와 하나님 앞에서 실수하고 범죄하였습니다. 그 기록이 구약성경 여러 군데 나옵니다. 실수로 치면 왕이 되자마자 법궤를 다윗 궁으로 옮기면서 레위지파 고핫 자손들이 메어서 옮겨야 하는 법궤를 편리성을 전제로 암소수래에 실어서 옮기다가 소가 뛰자 법궤를 이를 염려한 웃사가 손으로 수레를 붙잡았다가 불경죄로 현장에서 죽는 비극적인 일을 당하게 하였던 실수를 합니다. 다윗의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정확한 이해부족이 신하 한 사람을 애매히 죽게 하는 엄청난 잘못으로 비화한 것입니다. 우리가 다 아는 밧세바 사건은 개인적인 성범죄입니다. 거기다 그 남편 우리아를 죽게 하는 살인죄까지 범하였습니다. 인구조사도 범죄입니다.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고 자기의 힘을 확인하는 일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과 먼 일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다윗은 하나님의 공의를 경험합니다. 사랑의 하나님도 경험하지만 공의의 하나님을 더 무섭게 모시고 경험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잘못하고 범죄하면 사랑하시기에 징계를 통하여 깨닫게도 하십니다. 그래서 성도가 징계를 받게도 됩니다. 이렇게 공의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범죄하면 일어나십니다. 그리고 엄중하게 꾸짖으십니다. 그게 성도의 입장에서는 징계를 받는 일도 일어나게 되기도 합니다. 성도가 징계를 받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고 말입니다(히12:8).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서 더러 죄를 짓고 그리고 징계를 받고 그럽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분명히 말합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고. 분명히 죄를 지었는데 아무렇지 않다, 전혀 징계가 없다, 그러면 그건 심각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만약에 내가 범죄하였는데도 전혀 아무런 징계가 없다, 그건 정말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정죄와 심판은 없으나 징계는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징계를 받을 때에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그걸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합니다.
신앙인들의 된 자세냐, 엉터리 자세냐는 그가 징계를 받아보아야 알게 됩니다. 제대로 된 신앙인 자신이 잘못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으면 겸손하게 엎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립니다. 그야말로 회개하는 일입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저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만 있으면 그건 엄청나게 잘못 받아들이는 태도일 것입니다. 그야말로 바람직하지 못한 자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는 사람들 앞에 웅덩이를 두시고 수렁을 두시기도 합니다. 잘 이기고 잘 넘겨라 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징계를 받고 나서는 더 이상 동일한 범죄를 하면 안됩니다. ‘앞으로는 더는 같은 죄를 짓지 않고 살겠습니다’라고 결심하여야 합니다. 이게 범죄의 효과입니다. 아니 범죄를 용서받은 효과입니다. 실제로 다윗은 한 번 죄를 짓고는 다시는 그와 같은 죄를 하나님 앞에서 짓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실수가 몇가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일생에서 그 죄를 짓고 나서 다시는 그 죄를 범하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그만큼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았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이 점이 바로 다윗의 훌륭한 점입니다. 밥 먹듯이 동일한 죄를 지으면 안됩니다. 그 죄를 끊고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귀하게 보시고 복을 주십니다. 왜 다윗이 훌륭한 사람입니까? 그 이유입니다.
1. 금식하고 엎드린 다윗
16절,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생각해 보니 다윗은 자신이 엄청 잘못했습니다. 그는 남의 아내를 취하여 아기를 갖게 한 사람입니다. 그것도 그 여인의 남편을 치열한 전장터에서 죽도록 조치하여 간접살인까지 하였습니다. 다윗의 범죄의 결과는 그냥 지나지 않고 그 사이에 아기를 갖게 되었고 마침내 아기를 낳았는데 그가 병이 든 것입니다. 돌아보니 하나님 앞에서도 잘못했고 사람들 앞에서도 잘못했습니다. 그것도 조금 잘못한 게 아니라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고 무지무지 잘못한 것입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없었습니다.
다윗은 이제 아무런 변명도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야말로 금식하며 납작 엎드렸습니다. 죽었다고 숨죽여 엎드렸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병이 들어 생명이 경각에 달렸습니다. 아빠인데도 아무런 도움도 못되고 그 어떤 할 일을 찾지 못합니다. 그야말로 기가 막히는 순간입니다. 이쯤 되면 범죄자로서는 그저 하나님의 용서와 처분을 기다릴 뿐입니다.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얼굴도 들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전적으로 우리 하나님이 처리하여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셔야만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도저히 살 수도 없고 숨을 쉴 수도 없습니다. 도대체 지금 다윗에게는 그 어떤 체면도, 그 어떤 위치도, 그 무엇도 없습니다. ‘그저 살려만 주십시오’라는 심정으로 회개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납작 엎드렸습니다. 죽기살기로 하나님께만 매달리는 신앙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엎드리는 것입니다. 회개도 엎드리는 것입니다. 특히 잘못했습니다 라면 납작 엎드려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정말 조용히 납작 엎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리고 처분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그런데 잘못하고서도 큰소리 치면 그건 허세입니다. 잘못하면 매를 자초합니다. 말도 안되는 자세입니다. 내가 잘못했는데, 내가 엎드리고 회개해야지, 그저 처분을 기다립니다라고 해야지 도리어 큰소리 친다 그건 잘못해도 너무 잘못하는 자세입니다. 신앙이 아니라 비신앙적 자세입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앞에서 범죄를 하고 숲속으로 숨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찾으셨습니다. 그러자 아담과 하와가 하는 대답은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하나님이 두렵고 그 두려움으로 숨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의 심리로는 죄를 지으면 하나님을 피하고 숨으려 합니다. 그렇다고 해결이 되는게 아닌데, 그런데 그렇게 됩니다. 죄를 지어놓고 피한다고 해결이 됩니까? 숨는다고 해결이 됩니까? 죄의 결과는 그대로 있는데 죄지은 사람만 피하면 그건 현장회피 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은 안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행동이 정석입니다. 죄를 지었으면 그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엎드려 회개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먼저 해결을 보아야 합니다.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회개하는 다윗의 진지한 모습입니다. 절대 복종하는 다윗의 자세입니다. 순종하고 엎드린 다윗의 아름다운 신앙자세입니다.
시6:2절,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뼈가 떨리도록 엎드려야 합니다. 죄로 인하여 회개하느라 수척해져야 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회개하는 자의 정상적인 상태입니다. 다윗은 그랬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시6:6절). 죄를 지었고 용서받기 전에는 침상을 적시고 눈물로 회개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성도가 죄를 짓고 징계를 받을 때, 회개를 통하여 용서받고 죄를 정리하여야 할 것입니다.
죄지은 자에 대한 우리 하나님의 초청장입니다.
사1:18절,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성도가 죄를 지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초청하십니다. 오라고, 내 앞으로 나아오라고, 내 앞에 나와서 변론하면 하나님이 용서하시겠다고 확실한 약속을 보장하셨습니다. 그 보장이 여러분과 저에게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말고 나가야 합니다. 나가서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내어 놓고 용서를 구하고 처분을 기다려야 합니다. 같은 죄를 지었어도 세상으로 나간 가룟유다는 죽었지만 주님께로 나아간 베드로는 용서받고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나가면 사랑의 하나님이 해결하여 주시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가서 엎드려야 합니다. 나가서 고해야 합니다. 아담처럼 피하여 숨지 마세요, 가룟유다처럼 도망가지 마세요, 다윗처럼 나와서 엎드리세요, 비록 엄청난 죄를 지었고 사람들 앞에서도 얼굴을 못들 몹쓸 철면피한 죄를 지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와 상대하여 주십니다. 외면하시지 않으십니다.
17절,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그 곁에 서서 다윗을 땅에서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과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
다윗은 먼저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모든 것 보다 하나님 앞에서 해결받기를 우선으로 구했습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하나님이 도우셔야 합니다. 다른 것으로는 해결이 안됩니다.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징계를 받을 때, 하나님 앞에 조용히 나가서 엎드리는 게 상책입니다. 다윗의 장점이 바로 이 점입니다.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모든 짐 내려놓고 주 십자가 사랑을 믿어 죄 사함을 너 받으라
주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마음을 쏟아노라 늘 은밀히 보시는 주님 큰 은혜를 베푸시리
그런데 7일 만에 그만 다윗 왕의 갓난 아들이 죽었습니다. 다윗의 회개가 효과도 없이 하나님은 그만 그 아들을 데려 가셨습니다. 기도하던 다윗은 전혀 기도의 효과를 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입니다.
2.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20절,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
이상한 일입니다. 신하들은 감히 왕에게 아이가 죽었다는 말도 못 꺼내고 있는데 다윗은 일어나 몸을 씻고 의복을 갈아입고 음식 차려 오라고 합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을 다윗이 한 것입니다. 지금 아들이 죽었는데, 왕을 지켜보던 주위의 사람들은 다윗의 이 행동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들이 죽었기에 당연히 다윗은 소리내어 울고 불고 할 차례입니다. 그런데 전혀 다른 행동을 한 다윗입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놀란 것입니다.
다윗의 행동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아멘입니다. ‘내 사랑하는 아이가 죽고 사는 것은 다 하나님께 달렸나이다’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확실하게 믿나이다’입니다. 내가 아무리 요구하고 아무리 기도하고 금식하여도 하나님이 하시는 그 일을 어떻게 해요, 사람의 죽고 사는 일은 다 우리 하나님의 뜻 아래 있나이다, 높으신 그분의 섭리 아래에 있나이다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제 7일간이나 엎드려 있었던 그 차가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였습니다. 높으신 우리 하나님의 섭리를 믿나이다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수용합니다. 믿나이다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선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대로 수용하였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이 찬송가 549장에 얽힌 배경입니다. 1618년에서 1648년까지 30년간 독일에서는 천주교와 개신교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는데 이것이 이른바 30년 전쟁입니다.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독일은 온통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에 더하여 전쟁 직후에 흑사병이 창궐하여 이 때문에 1,600만 명이던 독일 인구 중 무려 1,000만 명이 사망하는 참혹한 상황이 빚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전쟁에 개입해 승리를 이끌었던 프랑스는 천주교의 손을 들어주었기 때문에 개신교도들은 이중 삼중의 고통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장 치열한 격전지이었던 "실레지아"라는 곳에서는 전쟁이 끝난 후 대부분의 주민이 종교개혁 이전의 천주교로 돌아 가버렸는데 이곳에 벤자민 슈몰크(Benjamin Schmolk, 1672-1737)라는 개신교 목사님이 그곳에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는 종탑도 없어졌고 그저 통나무와 흙벽으로 된 예배당 하나만 덩그렇게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교회가 담당하는 교구는 주변의 36개 마을이나 되었습니다. 천주교의 박해가 심해 종탑도 세울 수 없었고 심지어는 장례식도 허락을 맡아야만 치를 수 있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벤자민 슈몰크 목사님 부부는 실망하지 않고 선교에 열중하였습니다. 계속된 선교와 심방으로 벤자민 슈몰크 목사님은 과로로 자주 쓰러졌고 급기야는 30대 초반에 중풍에 백내장까지 겹치게 되었습니다. 중풍으로 인해 절룩거리고 눈까지도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선교 정열은 식지 아니하여 36개 마을을 빠짐없이 심방하며 다녔습니다. 이를 보고 많은 교인들이 감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1704년 슈몰크 목사님이 32세 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는 언제나처럼 아픈 몸을 이끌고 여러 지역을 심방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통나무로 지은 목사관이 불에 타버려 연기만 모락모락 나기 때문입니다. 급히 두 아들을 생각하고 잿더미를 헤치니 사랑하는 두 아들이 부둥켜 안은 모습으로 잿더미 속에서 타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슈몰크 목사님 내외는 두 아들의 시체를 앞에 놓고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끝내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절규하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기도가 찬송가 549장의 가사입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큰 근심 중에도 낙심케 마소서,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롬14:8절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당시 상황이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납니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시기를 구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참 하나님의 자녀가 구하여야 할 기도일 것입니다. 그런 신앙의 다윗은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하나님께 올라가서 정리합니다. 죄정리, 마음정리, 감정정리, 그리고 털고 일어납니다. 그리고는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 전적으로 아멘입니다. ‘사랑하는 아이가 죽고 사는 것은 다 하나님께 달렸나이다’였던 것입니다. 성도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도, 징계를 받을 때에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에 따라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아멘입니다.
3.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23절,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자기를 접는 용기, 이것도 대단한 용기입니다. 더 이상 고집을 부리거나 떼를 쓴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면 그대로 접고 새롭게 털고 일어나기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런 사람입니다. 다윗에게서 가장 귀하고 가장 무게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당신의 뜻이라면 웃는 얼굴로 당신의 뜻이라면 따르겠어요’ 이게 제대로 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정확한 뜻을 확인하면 내걸 접는 용기, 이게 필요합니다. 세상이 뭐래도 나는 내 뜻대로 해, 이건 용기도 아니고 이건 고집이요 엄청난 아집입니다. 사울왕은 하나님의 뜻이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이었고 자기도 그걸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다윗을 잡으려고 그야말로 빈대 잡으려고 초가집을 태우는 만용을 부리다가 망한 사람입니다. 이러 것을 만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니 아이가 죽었습니다.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세상에 나오자 마자 죽었습니다. 그것도 순전히 아빠의 잘못 때문입니다. 제대로 자라보지도 못하고 정말 억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히고 얼마나 속이 쓰리겠습니까? 그런데도 다윗은 그 쓰린 속을 이제는 달래고 ‘하나님의 뜻이군요’ 그러고는 그대로 아멘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순응하며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신앙이 뭡니까? 하나님의 뜻을 순응하며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된 신앙입니다. 다윗이 그럽니다.
아들이 지금 죽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바로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입니다. 이제는 내가 가는 일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멘합니다. 그래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얼굴을 씻고 이제부터는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아야지요, 이제부터는 하나님 앞에서 정도를 걸으며 살아야지요, 아니 하나님 앞에 갈 그날을 준비해야지요 입니다. 이것이 신앙다운 신앙입니다. “지금은 죽었으니...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그러니 내가 갈 준비를 하나하나 잘 해야지 그 말입니다.
이제 앞으로 할 일은 내가 할 일들입니다.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날 것도 아닙니다. “지금은 죽었으니...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이제 할 일은 내가 할 일만 남았습니다. 회개하고 난 뒤에는 내가 할 일들이 하나하나 앞으로 다가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하나요? 그건 이제 내가 결정하고 내가 행하여야 할 일들입니다. 그렇습니다. 화개한 사람들이 할 일이 어떤 것입니까? 다윗은 죄를 지었을 때는 엎드렸고 금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수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일에서 벗어나서 뒤로 자기가 할 일, 자기의 취하여야 할 행동을 알고 그대로 뚜벅뚜벅 걸어가고자 합니다. 이게 바른 신앙입니다. 이게 성도가 징계를 받을 때의 바른 자세입니다.
고전10:13절,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성도가 어려운 일을 당하고 나면 피할 길을 주시고 능히 감당하도록 힘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공 안에는 실패의 요소가 담겨져 있고 실패 안에는 또 다시 일어날 길을 준비하여 제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우리가 돈을 버는 일이든지 사회적으로 명성을 얻는 일이든지 혹은 저 같이 목회를 하는 사람들에게도 소위 성공했다면 그 안에는 실패의 요인이 언제나 같이 있다는 인식을 하여야 합니다. 동시에 그 안에서 실패하였어도 그 반대로 다시 일어나고 버티고 견디고 승리할 요인도 같이 있다는 것도 인식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걸 발견하기를 기대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다윗을 보시고 그 뒤에 이어서 솔로몬이라는 훌륭한 아들을 다시 주셨습니다. 피할 길을 주신 것입니다. 요나를 징계하신 후에 큰 물고기를 준비하셨습니다. 물고기의 징계를 하신 후에는 바닷가 모래를 준비하셨습니다. 지금도 준비하시고 피하게 하시는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죄를 짓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도 하나님은 반드시 그에게 피할 수 있는 길, 신앙으로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예비하시고 제시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하나님 앞에 잘못하여 징계를 받더라도 그 징계 이 후에 제시하시는 회복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너는 그 자리에서 그 죄로 인하여 죽어’ 그렇게 말씀하시는 우리 주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었다고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면 그건 우리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길을 예비하시고 제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회복하고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
다윗의 말입니다. 현재시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입니다. 그 일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요합니다. 그 일이 바로 내가 할 일입니다. 내가 할 일, 그걸 찾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할 가장 가치 있는 일,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할 가장 바람직한 그 일, 그걸 찾아서 내가 하여야 합니다. 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바로 그것뿐입니다. 이미 지나간 것에 집착하면 안됩니다. 이미 정리된 것을 가지고 이리저리 고민하면 안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그것, 최선을 다하면 이루고 도달할 수 있는 그일, 그걸 찾아야 하고 거기에 집중해야 합니다.
다윗만 훌륭한 사람이 아닙니다. 다윗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의 다윗을 찾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을 찾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고개를 들고 하늘의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그 기대치를 알고 그 기대치에 부합하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성도를 찾으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사람이 세상과 구별된 사람이요 세상의 가치관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가치관으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을 치는 사람입니다.
지난 한 주간 새벽기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더욱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이 새롭고 더욱 열심을 내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 꼭 필요한 리더십을 찾게 해 달라고,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보내주십사고 기도하였습니다.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초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최상을 찾고 발견하기, 하나님의 뜻을 찾고 발견하기, 이것이 우리가 할 일들입니다. 이게 바른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자세입니다.
맺음 :
성경을 보면 다윗은 분명 간음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죄없는 그녀의 남편, 착하고 성실한 충신 우리아를 전장에서 죽게 한 정말 몹쓸 짓을 한 비겁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녀로 하여금 아이를 갖게 하였고 그리고 낳자마자 그 아이가 병에 들었고 7일 만에 죽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한 것입니다. 아비의 범죄로 인하여 태어나자마자 7일 만에 죽은 아이, 그는 무슨 죄가 있는 아이입니까? 정말 기가 막히는 스토리입니다. 모두가 다윗의 범죄요 징계입니다.
그런데 성경 대하29:2절에는 히스기야 왕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그의 조상 다윗의 길로 걸으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왕상15:3절에는 “그의 마음이 그의 조상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라고 다윗의 마음을 성경의 표준처럼 표현합니다. 다윗의 길, 다윗의 마음, 정말 다윗에 대한 엄청난 축복이요 엄청난 칭송입니다. 분명히 다윗은 범죄한 인물이요 실수한 사람인데도 이처럼 성경역사는 다윗을 훌륭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신약의 마1:1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의 징계를 잘 견디고 이기고 극복한 다윗이었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문제는 내가 한 행동이 아닙니다. 그 행동 뒤에 처리하는 일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하고 징계를 받을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뒤가 더 중요합니다. 성도가 징계를 받을 때 하는 갖는 자세가 중요하고 징계를 받아들이는 행위가 중요합니다. 다윗이 이를 잘 보여 줍니다. 죄를 지었으면, 하나님의 징계가 시작되었으면,
1.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조용히 엎드려야 합니다.
2.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아멘해야 합니다.
3.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이제 회개한 내가 할 반듯한 일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성도가 징계를 받을 때, 다윗처럼 잘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이후는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