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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대예배 설교

Sun Jun 25 2017 02:00:00 GMT+0000 (Coordinated Universal Time)

주보 :

제목 :

제목 : 노아 홍수, 그리고 하나님

본문 :

본문 : 창6:1-8

오늘은 6.25 제 67년째가 되는 날입니다. 1950년 6월 25일, 이날도 주일이었습니다. 마침 이때가 농번기라서 많은 남한의 군인들이 모내기 농번기 휴가와 외출, 외박을 가고 전방이 비었던 그 시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 공산군이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남북 군사 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기습적으로 남침함으로써 6.25 동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불과 사흘 만에 서울 함락, 한 달 만에 낙동강 지역을 제외한 한반도 전 지역을 빼앗기게 된 대한민국의 위기에서 국제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모두의 반대 속에 성공확률 5000:1로 불가능에 가까운 작전을 성공하여 인천으로 가는 길이 확보하고 북진하여 압록강 까지 갔다가 중공군의 참여로 다시 후퇴하고 접전을 벌려서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협정되기 까지 만 3년 1개월의 치열한 전쟁을 피비린내 나게 치러야 했습니다.

6.25는 나라를 지키는 날입니다. 어느 민족 누구나 자기 나라를 지키고 보호해야 합니다. 6.25동란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고 한국군 15만 명, 미군 4만 명이 죽어가면서 나라를 위하여 싸우고 싸웠습니다. 또 참전 16개 나라가 연합하여서 수많은 청년들이 죽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피값으로 세워진 나라가 바로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입니다. 이렇게 싸우고 싸워서 지켜낸 대한민국이요 이 나라의 자유입니다. 그 희생을 기억하고 함께 지키고 보호해야 하는 이 조국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입니다.

지난 주의 설교말씀이 귀를 울립니다. 창4장의 가인의 길, 아벨의 길이란 제목의 말씀이었는데, 아담의 후손들에게는 가인의 길로 가기도 하고 아벨의 길로 가기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인의 길의 한 사례는 바벨탑 사건인데, 그들이 자기 이름을 내고 자기들의 흩어짐을 면하려고 열심히 일하고 애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이 없는 자기들만 있었던 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세월이 지나서 보니 그들은 하나님 앞을 떠나버리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벨의 길은 열심히 몸으로 드리는 영적예배자들로 부지런히 예배자로 살다가 마침내는 세월이 가도 셋처럼,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난 한 주간을 가인의 길에서 하나님 없이 오직 자기만을 위하여 열심히 살아왔습니까, 아니면 아벨의 길에서 열심히 몸으로 드리는 영적예배자로 살아오셨습니까? 가인의 길, 아벨의 길, 그 두 길에서 우리는 과연 어디에 서서 부지런히 살아왔고 또 부지런히 살아갈 것입니까?

가인의 길은 어쩌면 너무나 상식적인 길, 일반적인 길이었습니다. 여러분들과 저의 길, 우리 모두도 여전히 열심히 각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난 후에 그들의 길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가인은 하나님 앞을 떠나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벨의 후손들은 여전히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엇의 차이였다구요, 일상의 삶의 조그만 차이입니다. 롬12장처럼, 몸으로 거룩한 예배자로 서야 합니다. 우리들의 몸이 예배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하고 언제나 예배자로 서야 합니다. 어렵지만 그래도 참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구요, 부지런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은 그 후예들이 살아가던 한 시절의 사건입니다.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이 그들이 사는 모습에 개입하셔서 일으키신 사건이 바로 노아홍수 사건입니다. 아담의 6대손 노아시절에 까지 역사가 흘러 왔고 사람들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이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평가를 내리신 사건입니다. 노아홍수 사건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직접 역사에서 일어났고 그리고 지구상에는 그 흔적이 수도 없이 많이 나타나 있는 게 현실입니다. 노아 홍수, 그리고 하나님, 함께 은혜를 나눕니다.
1.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1,2절,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의 후예들이 땅에서 번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그들은 그야말로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번성하여 갑니다. 사람들의 수가 많아져 가고 하는 일들이 잘 되어 가고 무엇이든지 차츰 차츰 더해 가고 더 잘 되어 갑니다. 이렇게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이때에 잘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잘 될 때에 조심해야 합니다.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잘해야 합니다. 사람들이라는 것은 나의 일들이 뭔가 잘 되면 내가 잘해서 다 잘되는 줄로 압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잘 될 때 더 조심하고 더 엎드려야 합니다. “형통할 때에 ” 형통할 때에 더 잘해야 합니다. 이게 사람이 살아가는 바른 길들입니다.

어떤 성도에게 부모로 인하여 엄청난 재산이 들어오는 축복이 찾아왔습니다. 목사인 제가 그 말을 듣고 정말 그를 축복해 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성령님의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그에게 진심으로 권고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그리고 하나님은 은혜라고, 그리고 하나님께 은혜로 그 재산을 잘 지키라고, 그리고 그 재산에 대하여 십분의 일,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반드시 구별하여 하나님께 잘 드리라고, 그리고 나머지 십분의 9를 하나님이 잘 지켜 주시고 도와 주실 것이라고 진심으로 권면하였습니다. 그리고 정말 진심을 담아 기도하고 축복했습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때에 잘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났더니 그 성도님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들려오는 소리는 목사님이 십일조하라고 했다고, 여러분, 성도가 하나님 앞에 헌금하면 목사의 생활비가 올라갑니까? 교회에 재정이 늘어가면 목사가 재정을 더 많이 사용하고 씁니까? 아닙니다. 목사님이 제대로 잘 가르쳐야지요, 십일조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가르쳐야지요, 십일조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아직도 그것이 믿어지지 아니하면 그건 초보신앙입니다. 아직도 십일조생활도 아니하면, 아직도 그것 아까워서 드리는 일을 망설인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하나님 앞에서 멀고 먼 사람들입니다.

잘 될 때에 잘해야 합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 때에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더 겸손하고 조심하고 더 엎드리려고 노력하여야 합니다. 일이 잘 되고, 건강하고, 자녀가 잘 되고 무언가가 잘 되고 형통할 그 때에 잘 풀려갈 때에 조심하고 겸손하여야 합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아멘하는 사람, 그가 하나님 앞에 잘 사는 사람입니다. 잘 된다고 큰소리하면 안됩니다. 잘 된다고 자랑하면 안됩니다. 잘 될 때에 잘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1,2절,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노아홍수의 배경인 당시의 현상들입니다. 즉 가인의 길에 서서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들이 타락하여 가는 장면들입니다. 아마도 셋의 후예들로 해석을 합니다. 지구상에 사람들이 급속하게 번성하기 시작하자 여기저기 문제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는데 셋의 후손들이 가인의 후손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취하여 사건입니다. 한마디로 하면 자기 마음대로 사는 시대였습니다.

사람들의 타락의 원인들이 바로 눈 앞에 보이는 대로 평가하고 살아가는 삶의 현상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분석하고 평가하고 판단하고 살아가면 타락하게 됩니다. 이걸 잘 이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전서 1:17절에서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라고 기록합니다. 예수님도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런데도 사람을 외모만 보고 아내로 취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기뻐하시지 않으시고 그들을 축복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의 방침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사람들을 평가하기를 그들의 외모로만 평가하고 판단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죄없다 평가하시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오히려 외모만으로 사람을 평가한다면 그건 죄라고 선포하십니다. 심지어

외모지상주의를 넘으시기 바랍니다. 여자들의 관능적 아름다움이 그 사람들에 대한 평가의 기준이었고 이것이 사람들의 욕심을 발동시켜 서로 엉키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인간타락으로 연결되었던 것입니다.

벧전3:3,4절,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2. 한탄하시고 근심하시는 하나님
5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에덴동산을 떠나서 삶을 시작한 사람들이 땅 위에서 번성하여 가고 가인의 후예들과 아벨의 후예들이 서로 엉켜서 살다가 보니 누가누구인지를 모르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아벨의 후예인지 가인의 후예인지를 모르게 뒤엉켜서 모두 같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모신 하나님이 그만 절망하셨습니다. 그들이 사는 모습을 보신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한마디로 하면 이렇습니다.

“모든 계획이 악함을 보시고”
하나님은 사람들의 생각을 보십니다. 마음을 보시고 다 아십니다.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를 다 아시고 그리고 살피십니다. 그리고 평가하십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고 평가하는 것과 전혀 다른 평가일 수가 잇습니다. 마치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과 같습니다(사55:9). 하나님의 평가기준으로 보시니까 이건 아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생각이나 삶이 올바르고 제대로 되어 있어야 합니다. 내 생각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됐어’ 라고 하시는 그런 평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인의 후예들처럼 악한 생각을 하고 나쁜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의 계획을 흩트려 버리시고 바꾸어 비리시고 물리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게 바벨탑 사건입니다. 그래서 바벨탑은 부서졌고 언어가 혼잡해졌으며 그리고 파괴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 생각을 바르게 가지고 바른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고, 그리고 사랑은 악한 것들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그렇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다 보시기 때문입니다. 보시고 아시기 때문입니다. 아시고 판단하시고 그리고 이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생각을 올바르게 가지고 정의와 진리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에게도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가 되면 안됩니다. 이게 얼마나 안타까운 상황입니까? 우리는 반대로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선을 따르고 진리를 따르며 아멘을 따르려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길을 아시고 도우실지 흩트려 버리실 지를 결정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고 흐뭇한 백성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바르고 선하고 아멘하고 순종하고” 여러분들과 제가 하나님 앞에서 다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사무엘상에 나오는 제사장 엘리는 우리가 아는 대로 두 자식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엘리보다 더 심각한 것은 다윗 왕이었습니다. 다윗은 아들들이 서로 싸우고 목숨을 빼앗는 일들을 목격해야 했습니다. 오히려 아버지를 해치려고 덤벼들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는 탄식입니다.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삼하16:11). 생각과 행동, 삶이 그저 악하기만 하였던 다윗의 아들들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은 그 아들들을 흩어 버리신 것입니다. 

설득이 불가능한 사회가 비극적 사회입니다.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입니다. 물론 효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오히려 정반대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고 우리 하나님이 탄식하시게 하면 그건 정말로 곤란합니다. 그러하다면 내 생각을 내리고, 내 주장을 접고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고 평가하시는 그 앞에서 생각하고 살아가는 그런 지혜가 꼭 있어야 합니다.

시1:1-3절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하나님이 보셔서 가장 흐뭇해 하셨던 성경말씀이 바로 사도행전 13:22절의 기록입니다.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너무나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민수기 12장을 보면 모세가 구스여인을 아내로 취하자 나이가 많은 누나 미리암과 형 아론이 그런 지도자 모세에게 비방을 쏟아냅니다. 우리가 보기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모세의 편을 드십니다.

민12:6,7절,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건 평소의 모세를 보시고 하나님이 평가를 하신 것입니다.

3절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하나님은 모세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깊이 아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모세가 잘못하였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런 모세를 받으시고 오히려 그렇게 꾸중하는 미리암과 아론을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는 평소에 하나님께 비춰지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 중요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보시고 나를 어떻게 평가를 하시느냐가 중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5절처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이러면 이건 곤란합니다.

모세처럼 평소에 하나님께 잘 보이기를 바랍니다. 다윗처럼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너무나 아름다운 표현처럼 우리도 이런 다윗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길에 서면 안됩니다. 아벨의 길로 가야 합니다. 셋의 길로 가야 합니다. 그래도 가다가 보면 곁길로 가고 가다가 보면 육신의 정욕이 발동합니다. 안목의 정욕도 발동합니다. 이 생의 자랑들도 발동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자초하기도 합니다. 온유하고 충성된 모세가 되십시오. 하나님 마음에 꼭 맞는 다윗이 되십시오. 오늘 우리들의 개인개인들의 생활을 보시는 그 하나님이 한탄하시고 근심하시게 하면 안됩니다. 오늘 우리 교회를 보시는 그 하나님이 한탄하시고 근심하시게 하면 안됩니다. 역시 사랑하는 여러분, 온유하고 충성된 모세가 되십시오. 하나님 마음에 꼭 맞는 다윗이 되십시오. 하나님이 만족하시는 그런 아벨의 후예, 셋의 후예들이 되시기 축복합니다.
  
3. “그러나 노아는 ”
8,9절,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

노아는 당시의 사람들과 똑같은 셋의 후예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러나 노아는”이었습니다. 그런 노아였기에 그는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과의 대화를 가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당시의 그 많은 가인의 후예들과 아벨의 후예들과 더불어서 땅 위에서 같이 뒹굴고 뒤엉켜 살았지만 그러나 그들과 달랐습니다. 하나님을 근심시키던 그들과 달랐습니다. 비록 동시대, 동일환경에서 살아갔지만 그러나 그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렇게 살아가던 노아였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면서도 그 세상에 섞이고 파묻히지 아니하고 그리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그들이 바로 애녹이요 아브라함이요 이삭이며 모세였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그 시대를 거슬러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속에 파묻히지 아니하고 세속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속에 같이 더불어 살면서도 같아지지 아니하고 그리고 그 속에서 믿음을 지키고 그 속에서 하나님과의 교제의 끈을 놓지 아니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그로나 노아는 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노아를 찾으셨고 그리고 그에게 일일 맡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긴 세월 간 오로지 그 명령에 따라서 방주를 짓는 그 일에 전념하였고 마침내 방주를 다 지어서 자기의 온 가족들 8명을 구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의 노아를 찾으십니다. 가인의 후예들, 아벨의 후예들이지만 보이는 데로 살아가고 사람을 오로지 외모로만 평가하고 판단하고 그 보기에 좋은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과는 완전히 다른 가치관과 기준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이 시대의 노아를 찾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바로 그러하신 하나님의 눈에 드는 인물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자라 내 뜻을 이루려 하노라” 그런 대상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대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찾으시고 그리고 그들에게 희망을 걸고 비록 세월이 걸리더라도 방주를 짓도록 부탁하고 위임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그리고 기나 긴 세월간 동안 방주를 지었습니다. 어릴 때 불렀던 노래입니다.
노아 할아버지 배를 짓는다 노아 할아버지 배를 짓는다 높은 산 꼭대기에 배를 짓는다. 앞집의 박첨지 뒷집의 김첨지 모두가 반대하여도 높은 산 꼭대기에 배를 짓는다.

그랬습니다. 정말 노아는 오로지 하나님 바라보면서 세상에는 귀를 막고 살았습니다. 그 긴 세월간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 붙잡고 그리고 하늘만 바라보고 줄기차게 망치질을 하고 톱질을 하였습니다. 누가 뭐래도 흔들리지 아니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 그가 바로 노아였습니다. 이렇게 ‘그러나 노아는’으로 사는 사람들이 마침내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너무 들리는 소리에 귀를 열어 두고 살아갑니다. 남들의 평가에 너무 민감합니다. 나에 대한 평가, 나에 대한 말 한마디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을 하고 대꾸를 하려 합니다. 인간 풍조는 나날이 갈리어도 나는 내 믿음 지키리라 그래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비판하고 뭐라고 판단하여도 하나님 앞에서 나는 내 믿음 지키리라고 해야 합니다. 여호수아처럼, 나와 내 집은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하리라 선포하여야 하고 그렇게 믿음을 지켜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입니다. 이것이 하나님만을 열심히 바라보며 살아가는 아벨의 길이요 셋의 길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노아는 정말 끈기의 사람입니다. 한가지 일을 꾸준히 끝까지 한다는 것은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신앙은 끈기를 요구합니다. 끈기없는 사람들은 좋은 신앙을 가지는 것이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왜 가인이 실패하였나요? 복받쳐 오르는 서운함, 하나님은 동생에게는 응답하시고 자신을 거부하셨다는 소외감, 이런 것들이 그 마음 속에 밀려오자 더 이상 자신을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만 동생을 위해하는 불행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끈기가 부족하여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필요할 때에 인내하고 참고 그리고 끈기있게 자신을 잘 지켜가는 일에 실패하여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여러분들과 저는 “그러나 노아는”으로 살아가면서 끈기로 신앙을 세워가시기 바랍니다.

맺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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