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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 Jun 18 2017 02:00:00 GMT+0000 (Coordinated Universal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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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가인의 길, 아벨의 길
본문 :
본문 : 창4:1-15
성경에는 사람들이 비통하고 억울하고 속상할 때에 하는 표현하는 강한 표현에는 ‘방성대곡’하였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창세기에 이렇게 방성대곡한 사건은 묘하게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관련되어 세차례 일어났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의 후처 하갈이 아들인 이스마엘이 쫓겨나서 광야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고 어머니로서 너무나 원통하여서 방성대곡하였다고 기록합니다. 또 한번의 사건은 이삭의 아들 에서가 아버지 이삭이 자기 동생 야곱에게 축복했다는 사실을 알고 축복을 빼앗기고 나서 너무나 억울하고 원통하여서 방성대곡하였다고 기록하고 마지막은 야곱의 아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때에 가나안에서 양식을 사러 온 자기의 친형들을 알아보고는 그 사연이 너무나 기가 막혀서 방성대곡하니 그 소리가 바로 왕 궁중에 들리더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처 하갈이나 이삭의 맏이 에서 같은 경우에는 억울한 환경에서 정말 원통하게 일생을 살다가 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그 속을 들여다 보면 다 그렇게 살아가도록 된 요인들이 자기들에게 있었더라는 사실입니다. 하갈이나 에서는 다 정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져다 주는 축복의 길, 은혜의 길에서 벗어나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너무나 안타까워서 방성대곡하며 울었습니다. 당사자들로서는 당연히 속상하고 억울하였겠지만 그러나 그건 그들이 선 길들이었고 그들이 선택한 삶들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같은 시대, 같은 환경, 같은 집안에서 같이 살았는데 누구는 택함을 받고 누구는 버림을 받는다, 그건 정말 버림받은 쪽에서는 너무나 억울한 일일 것입니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억울함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이 어느 길에 서서 살았느냐가 그의 미래를 판가름 한다는 사실입니다. 같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12제자들이었지만 그러나 베드로와 다른 10명의 제자들은 평생을 예수님과 같이 살다가 갔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떠나서 세상으로 갔고 바울의 동역자였던 데마도 주님보다 세상이 더 좋아서 자기가 좋아하는 세상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은 자신이 선택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인생은 선택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 길에서 살고 은총을 누리고 살면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 은총을 피하고 다른 길에 서서 살면 그렇게 인생이 펼쳐지게 되는 법입니다. 복음을 만나고 복음으로 살 것인가? 복음을 외면하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추구하는 그 길로 갈 것인가, 그건 그 자신이 하는 선택으로 결정되어 집니다. 내가 하나님을 선택하면 하나님도 나를 선택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피하면 하나님도 나를 피하여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선택입니다.
또한 인생은 해석입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그렇게 펼쳐집니다. 나에게 주어진 인생을 해석하기에 따라 우리 인생은 그렇게 펼쳐져 살게 될 것입니다. 탕자는 아버지가 자기를 어렵게 하고 옭아매는 사람으로 해석하고 그 아버지를 떠나서 보이지 않는 머나먼 곳에 가서 정말로 편안한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러나 멀지 않아서 그 해석은 잘못된 해석이라 평가하고 인생을 다시 해석하였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풍성한 일군들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그는 드디어 아버지 집을 내 아버지 집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석하고 나니까 돌아가는 게 전혀 두렵지도, 망설이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그를 반겨 주었습니다. 역시 인생은 해석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인생을 들여다 보다 보면 사람들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누구와 어떤 관계들을 세워 가느냐가 그 인생을 결정하게 되는 걸 그대로 봅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본문의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사건입니다. 자기가 중심이 되어서 열심히 살아가는 가인같은 가인의 길에 선 인생들도 있고, 하나님 없이는 못 살아, 그러면서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요시 하고 하나님께 의논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살아가는 아벨 같은 아벨의 길에 선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과 저는 아벨의 길에서 아벨과 같은 사람들이 다 되시기 축복합니다.
1. “세월이 지난 후에”
3절,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가인과 아벨은 아담과 하와의 자녀들입니다. 그들은 동시대에 같이 인생을 살았던 형제들입니다. 그런데 역사는 그들을 전혀 다르게 평가하였습니다. 가인의 길을 간 사람과 아벨의 길을 간 사람들로 구분을 합니다. 같은 부모의 자녀인데, 같은 환경과 같은 시대에 삶을 살다가 갔는데, 그렇다고 무슨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 하나님과 역사는 전혀 다른 사람들로 평가를 하고 또 그런 평가를 받는다, 이게 안타까운 일들입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이렇게 가인과 아벨은 같이 제사를 드리고 같이 살아가던 의좋은 형제들입니다. 그런데 결과로 보면 나중에 형을 동생을 죽이는 사람으로 등장하게 되었고 동생은 형에 의하여 죽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아담 이후로 인류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으로 나눠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인과 아벨은 그 두 진영에 서로 나뉘어서 원수지간이 되고 그리고 서로 간에 치열한 전투를 벌리게 되었습니다.
롬9:11절,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특수한 선택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립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하여 그 인생이 좌우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더 심한 표현입니다. 롬9:15,16절,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나님이 특별한 경우에는 특별한 선택이 있고 그 선택으로 인하여 인생들이 펼쳐진다는 사실입니다.
창3: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결국 가인은 뱀의 후손이 되었고 아벨은 여자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뱀은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인 그런 서로의 관계로 나눠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와는 다시 아이를 낳았으니 그를 아벨의 대신으로 ‘다른 씨’를 주셨으니 그가 ‘셋’이라고 하였습니다. ‘셋’은 다른 씨였습니다. 그 씨는 여자의 후손이었고 하나님을 여호와로 이름을 부른 그런 씨였습니다. 롬9:29절,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하나님이 남겨 두신 그 씨가 바로 아벨의 후손이며 셋이라는 씨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남겨 두신 씨였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역사는 가인의 길과 아벨의 길을 구분하여 평가합니다. 역사는 평가하기를 맏아들인 가인은 세속의 사람이요 육체를 따라 살다가 간 인본주의적인 사람이라면 아벨의 삶에 대하여서는 성경에 별로 기록된 것이 없는데도 그는 믿음의 사람, 신앙의 사람, 언약의 사람이며 하나님 편에서 살다가 간 사람이라고 평가를 합니다. 그래서 가인의 길이 있고 아벨의 길이 있다는 말입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사람들은 그렇게 가인의 길과 아벨의 길로 평가를 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어느 길에 서 있는 사람들이십니까?
2. 가인의 길
가인은 아마도 열심히 인생을 살아간 사람일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그는 아버지 아담의 큰 아들 맏이였습니다. 그렇다면 맏이로서의 대단한 프리미엄을 갖고 살아간 사람일 것입니다. 정말 열심히 인생을 살았던 그런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런데도 불행하게도 아버지 아담의 특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평범한 길로 살다가 간 인물입니다. 역사에서 가인의 길에선 사건과 인물들을 봅니다.
요한1서 3:12절에는 “가인 같이 하지 말라”라고 경고합니다. 가인의 길은 경고받은 길이었고 모두에게 가지 말아야 하는 길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가인의 길로 간 사람들을 기록합니다.
1)바벨탑 사건
창11장에는 가인의 후예들이 동방으로 옮기고 옮기다가 시날이라는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서로 말합니다. 그게 11장 3절입니다.
창11:3,4절,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이게 하나님이 없이 사는 사람들만의 모임의 모습입니다. 이른바 바벨탑 사건이요 대표적인 반 하나님 주의 의 인물들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이제 흩어짐을 면하자’ ‘우리가 이제 하나님을 대신하여 우리들의 노력으로 힘껏 살자’ ‘그렇게 살아 보자’ 이것입니다. 뭐 특별히 잘못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어쩌면 똑똑하고 어쩌면 잘 준비하고 어쩌면 어려움을 미리미리 대비하는 지혜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또 그래야만 합니다. 그래야 세상에서 살아남고 그래야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도태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거기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힘으로 뭘 하자, 하나님이 없다, 이 문제입니다. 거기에 바로 우리를 지으신 우리 하나님의 임재와 섭리와 간섭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인간이 뭡니까? 인간이란 하나님의 피조물인데, 그런데 그 창조자이신 하나님과의 만남도 없고 의논도 없고, 혼자서 결정하고 혼자서 행동하고 혼자서 살아 가요? 그게 말이 안되는 일입니다. 그야말로 혼자 사는 시대이지만 그러나 신앙은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의논하여야 하고 하나님의 인도와 사랑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혼자서 바벨탑을 쌓지 마세요. 바벨탑이란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끼리는 거대한 탑을 쌓고 하늘에 그, 꼭대기를 닿게 하려 했던 인간들의 오만한 행동에 분노하신 하나님이 원래 하나였던 언어를 여럿으로 분리하여 저주를 내린 사건입니다. 바벨탑의 사건은 결국 하나님이 없이 혼돈 속에서 모든 막을 내리는 것을 말하고 그들의 불신과 오해 속에서 서로 다른 언어를 쓰면서 전 세계로 흩어지고 말았다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 없이 사람들만의 계획과 행동으로 살아가는 그런 가인의 후예들이 되면 안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는 그 길들이 편하다고 그길로 가면 넓은 길입니다. 좁은 길, 주님의 길로 가야 합니다. 어려서부터 주님이 가르치신 그길로 가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신앙을 가르치고 기도를 가르치고 순결을 가르치고 거룩을 가르쳐야 합니다. 가정의 아버지도 그렇게 살아야 하고 어머니도 그렇게 살아가야 하며 그렇게 자녀들에게 하나하나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가인의 길로 가지 않습니다.
2)이스마엘
갈4:22-24절,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자유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약속의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된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인생을 바르게 살고 제대로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3)에서
히12:16절,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이삭의 아들, 야곱의 형 에서는 이삭의 장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팥죽 한 그릇 음식을 얻기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동생에게 팔아 넘겼고 성경은 그 에서를 망령된 자라고 표현합니다.
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은혜를 소홀히 여기는 사람이요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축복을 축복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망령되이 여겼던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망령된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엄청난 영적 은총을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여긴 사람입니다. 엄청난 축복인 장자의 명분을 한 그릇 팥죽으로 바꿔버린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에서의 길에 선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에서는 방성대곡하고 그리고 성경은 엄중히 말합니다.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라고 기록합니다(창27:40).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직책을 축복의 그릇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그 직책을 에서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팥죽 한 그릇으로 바꾸고 던지면 그러면 그 직분을 주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되고 하나님은 그걸 망령되다고 여기십니다. 성경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고 가르칩니다(마7:6).
사도 요한은 여기에 대하여 명확하게 기록하였습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요일3:12). 성도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직분을 망령되이 여기고 행동하면 결코 복을 받지 못합니다. 이것이 가인의 길이요 에서의 길입니다. 거룩한 것은 거룩하게 여기고 알고 대하여야 합니다. 내가 나를 존중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결코 나를 존중하시지 않습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가인의 길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3. 아벨의 길
4절,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그 시절, 형 가인과 같이 그 동생 아벨도 하나님께 제물을 드려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이 드린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린 제물과 동시에 아벨을 받으셨습니다.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여기에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아벨의 길, 그 길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와 예배요 예배자입니다. 즉 예배자도 받으시고 예배도 받으시고 그에 드리는 제물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아벨의 제사는 그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였고 아벨 자체도 받으셨습니다.
아벨의 길은 하나님과 교통하며 사는 삶의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삶, 이것이 중요합니다. 아벨은 그렇게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간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사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은 하나님으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평가해 주시고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하나님의 사람, 그가 바로 아벨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가 되었습니다.
롬12: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예배를 드리려면 자기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자신의 몸을 거룩한 제물로 드리는 일, 여기서 영적 예배가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자기의 몸을 제물이 되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평소에 몸으로 거룩하게 살아야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다. 만약에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아니하게 살다가 하나님 앞에 가서 거룩한 예배를 드린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평소의 삶에서 말이 거룩하고 입이 거룩하고 손이 거룩하고 그렇게 거룩하여야 그래야 거룩한 산 재물로 드려진다는 의미입니다. 아벨의 길은 바로 이런 평소의 일상의 생활에서 하나님과 깊이 연결되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시139:1-4절,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다윗은 하나님은 우리를 살피시고 아시고 계시며 심지어는 모르시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다윗의 고백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다윗이었기에 그는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라고 고백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아시되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익히 아시는 분, 이미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나의 말한 모든 것,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으신 분,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이것이 다윗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런 다윗이었기에 그는 역사의 가장 훌륭한 인물이요 멋진 왕이었습니다.
나의 모든 것 중에서 모르시는 것이 하나도 없나이다.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그러하시다면 그분은 나의 진정한 왕이십니다. 그분은 진정한 나의 주님이십니다. 이런 믿음으로 고백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이것이 아벨의 길입니다. 그렇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길에서 모르는 일들이 하나도 없으십니다. 지금도 우리 하나님은 모든 것들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제물은 그 자체의 귀중성도 있지만 더 중요한 가치는 누가 드리느냐의 문제입니다. 제물을 구별하여 드리는 사람에 따라서 그 제물이 가치가 있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이 되는 법입니다. 그러나 제물이 아무리 흠이 없고 깨끗하다고 하더라도 그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깨끗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게 되고 말 것입니다.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음은 아벨도 제물도 다 깨끗하여서 하나님이 받음직하였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평소에 하나님과 교제하고 동행하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는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높은 평가를 받고 인정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서 그런 사람들을 더러더러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평가보다 우선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평가에 더 치중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평가를 귀하게 여기고 비중있게 듣곤합니다. 그러다가 믿음을 손해나게 하고 더러는 엄청난 중요한 것들을 쉽게 버리고 바꾸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것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할 지를 잘 판단해야 합니다. 확실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의 평가에 너무 귀를 기울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명령을 귀하게 여기고 실천하도록 힘써야 하며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소중하게 여겨야 제대로 된 믿음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었느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니라”(민15:41).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제대로 모시고 살아야 그게 제대로 된 사람들입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11:45).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려고,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셨구나,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려고 인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하나님이시오, 저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이걸 믿는 게, 이걸 은혜로 받아 들이는 게 엄청난 은혜요 은총이며 축복입니다.
이 깨달음이 있고 나면 여러분, 어떤 문제에서도 일어나고 회복될 수가 잇습니다. 우리 인생에 어떤 무거운 짐이 있든지 상관없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도우심 안에서 다시 일어나고 회복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짐으로 허덕이는 이들을 도우시고 힘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절망적인 자리에서도 용수철처럼 튀어 오를 수가 있도록 우리의 회복탄력성을 도우시는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성경 맨 마지막 글인 말라기 마지막 장인 4장의 2절입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아벨의 길에 선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경외하다란 말은 공경하고 두려워하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너무 크셔서 감히 뭐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 대상이 너무나 엄청나서 존경스러우면서도 공경하면서도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기에 생겨나는 두려움이 가득하다란 의미입니다. 경외란 하나님께만 해당되는 단어입니다. 절대자 하나님 앞에서 감히 뭐라고 할 말이 없는 상태, 이것이 경외함입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을 이러한 경외심으로 섬기고 모시는 사람들입니다.
아벨의 길에 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치료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회복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치료하는 광선이 발하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아멘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벨의 길에 선 사람들은 우리 하나님이 치료의 광선을 발하여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뛰어 다니게 될 것입니다. 이게 아벨의 길에 선 사람들에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이런 놀라운 은총이 모든 분들에게 가득하시기를 축복합니다.
4. 다시, 세월이 지난 후에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의 길과 아벨의 길은 전혀 다른 길에 서 있었습니다.
16절,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그들은 여호와의 앞을 떠나고 여호와를 멀리멀리 하고 떠났습니다. 정말로 열심히 산 가인이었다 할지라도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바벨탑이 그랬습니다. 하갈이 그랬습니다. 에서가 그랬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면 거기에 은혜가 없습니다. 축복이 없습니다.
26절,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호와의 앞을 떠난 가인과 달리 셋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약속의 사람, 은혜로 사는 사람, 그들은 세월이 지난 후에도, 세월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되어 잇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2:21). 그렇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에,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들이 될 것 같습니까? 세월이 가고 또 가도 아벨처럼 더욱 하나님께로 다가가시는 성도들, 그들이 아벨의 길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제대로 된 길로 가는 사람들이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시는 백성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엄청난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네 재산 전부를 팔아서 나에게 바쳐라’ 그러시지 않습니다. ‘네 시간 중에서 반드시 얼마를 떼어 내어서 나에게 바쳐라’ 그러시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자주자주 인생의 갈림길에서 가인의 길과 아벨의 길, 그 갈림길에서 아벨의 길에 서기를 요구하십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가인의 길로 가지 말기를 바라시고 아벨의 길에서기를 요구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며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는 분으로 믿고 고백하면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예배에서 승리하는 예배자들로 반듯하게 서기를 바라시는 분이십니다.
잠3:6절,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맺음 :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의 영역 안에 있으면서도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서 사는 가인의 길에 선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아벨처럼 하나님 가까이 다가가서 하나님과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사는 것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아벨의 길에 선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누구할 것 없이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서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사는 아벨의 길에서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세리장 삭게오는 예수를 만나고 나서 가치관이 달라졌습니다. 지금까지는 세속적인 판단과 가치관으로 살아왔는데 이제 예수를 만나고 나서는 그 모든 것에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살겠노라고 변했습니다. 가인처럼 인간적인 판단과 평가에 우선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아벨의 길에서 아벨처럼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자로 반듯하게 서도록 노력하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들이 서야할 길입니다. 여러분들과 저는 과연 어느 길에 선 사람들입니까? 가인의 길, 아벨의 길에서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