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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대예배 설교
Sun Jun 12 2016 02:00:00 GMT+0000 (Coordinated Universal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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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제목: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자
본문 :
요4:19-24
150년 전까지 스위스는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국토가 알프스 산맥에 둘러싸여 있는 고립된 분지에, 산위에는 만년설로 뒤덮여서 한여름에도 냉해로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치즈와 감자, 수프로 6개월이나 되는 긴 겨울을 견디는 참으로 살기가 어렵고 열악한 그런 나라였습니다. 그러다가 생각해 낸 것이 먹고 살기 위한 수단으로 다른 나라에 자기들의 인력을 수출하는 용병수출이었습니다. 다른 국가들이 전쟁을 할 때마다 스위스의 젊은이들이 가서 생명을 바치며 전투하고 그 대가로 돈을 벌어서 그 돈으로 본국의 가족을 살게 하는 그런 나라였습니다.
1527년 5월 6일 이탈리아군이 바티칸 교황청을 공격할 때 앞장서서 싸운 것이 스위스 용병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그때 스위스 용병 147명이 전사하였습니다. 1798년 프랑스의 마지막 황제 루이 16세를 지키다가 스위스 용병 600명이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이런 스위스의 용병 수출은 1800년대 초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는 긴 세월 동안 스위스인은 용병 수출로 먹고 살아야 했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들은 목숨을 팔아먹고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산업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가 16세기 후반인데 기독교 박해를 피해 프랑스의 교인들이 스위스로 넘어옵니다. 그들이 함께 모여서 주일을 지키고 예배를 지키면서 힘을 모으기 시작하였습니다.
스위스 사람들이 그 때 시작한 것이 시계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시계 만드는 기술을 배우고 익혀서 해외로 수출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만든 시계를 배낭에 가득 넣고 해발 5,000m가 넘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영국에 내다 팔았습니다. 작고 가벼우며 고부가 가치를 지니고 있는 스위스 시계는 한 배낭만 내다 팔아도 큰돈이 되었습니다. 스위스로서는 드디어 먹고 살 수 있는 새로운 산업이 생긴 것입니다. 그들은 여기에 또 하나 더해서 약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알약을 만드는 것이었는데 이는 약초가 많은 스위스의 자연환경과 잘 맞아 떨어졌습니다. 그들은 목숨을 걸어 그 제약 만드는 일까지 발전시켰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 최고의 스위스 시계와 제약 산업의 출발입니다.
신앙을 지키고 예배를 세우면서 시작한 스위스인들이 이제는 시계와 알약을 배낭에 가득 담고서는 알프스 산을 넘어 유럽전역을 다녀오면 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 장사꾼들은 한 사람이 적어도 100억, 200억 원의 매상을 올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요즘도 바쉐론 콘스탄틴 같은 시계는 1억, 2억 원을 호가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시계 산업은 해마다 17조 원어치를 수출하고, 제약회사인 노바티스가 420억 달러, 로슈가 349억 달러의 매출을 올립니다. 몇 년 전에는 기름 한 방울 없이 날아가는 태양열 비행기를 만들었고, 우주공간에 용도 폐기된 떠돌이 인공위성을 청소하는 위성청소용 위성을 만들어 돈을 벌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국민소득은 1인당 3만 불에도 못 미치는데 스위스는 8만 3000달러로 국가경쟁력지수는 세계 1위입니다. 신앙을 지키고 주일을 지키면서 그들에게는 놀라운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없는 것을 보고 낙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신 것을 발견해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명품으로 만들고, 가꾸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당신 자신입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자식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소모되는 그런 소모품이 아닙니다. 당신의 몸과 마음 영혼을 위하여 모든 것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신을 가꾸기를 요청합니다. 기도시간도 가지시고, 운동도 시작하고, 책도 읽으시길 바랍니다. 어떻게 하든지 성경암송을 하구요 찬양하고 기도로 하나님 앞에 신앙고백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인간, 그 존재 자체가 바로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기 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보내는 모든 시간 중에 예배드리는 시간 보다 더 귀중한 시간이 없고 인간의 모든 집회 중에 예배의 모임보다 더 엄숙하고 귀중한 시간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보다 더 엄숙하고 고귀한 시간이 없습니다. 국가의 고위직에 있는 인물을 만난다거나 시대의 영웅을 만나는 것보다, 아니 한 국가의 최고 지도자인 대통령을 만나는 것보다 더 귀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인물들은 이 세상에서만 귀한 인물들이지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이 세상 뿐 아니라 영원한 세상과 계속하여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굽어 살피고 돌보고 지키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어떤 사람들입니까? 정말 하나님이 찾으시는 인물은 어떤 사람이며,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눈에 발견되며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은 만나시는 것입니까? 본문에도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들, 그건 한마디로 바른 예배자들입니다. 바르게 예배하는 그런 사람들을 찾으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그렇습니다. 그리고 찾으신 그 예배자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런 대상의 인물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찾으심의 대상들이 다 되어 놀라운 은혜로 살아가시기 축복합니다.
1.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23절,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예배는 바로 하나님과 사람들의 만남의 시간들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나아가고 하나님은 예배를 통하여 사람들을 만나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접촉점이요 교제이며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접촉하는 시간들이 바로 예배자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 어느 곳에 머물 때나 언제나 성막을 치고 동서남북으로 세지파씩 12지파가 장막을 치고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하나님을 만나는 성막이 중심지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런 광야생활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언제나 하나님을 중심으로 예배하며 살아가는 것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그러고 이는 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언제나 하나님 중심, 성전중심, 교회중심, 예배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행진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중심, 예배중심으로 일생을 살았던 민족입니다.
창12:7,8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이런 예배중심의 삶은 쉽게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려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 갔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드리라면 드렸고 가라면 갔고 어디서든지 제단을 쌓으며 예배하였습니다. 제단중심의 생활은 결국 아들까지도 제사 드리는 일에 바치는 일로 나타났습니다. 모리아 산의 일을 다른 해석으로는 아브라함은 아들보다 제사를 더 귀하게 여겼다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만큼 제사를 귀히 여기고 예배를 소중하게 여겼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마음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아브라함의 그 제사중심의 신앙이 믿음의 조상이 되게하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독자, 100세에 얻은 독자,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아들이었겠습니까? 요즘 말로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프고 놓으면 날아갈세라 아깝고 아까운 그런 아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귀한 독자보다도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이 그를 제물로 하나님 앞에 제사 드려라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 명을 받은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바른 제사를 드리는 것이 이 아들의 생명을 지키는 일보다도 훨씬 더 귀하다, 예배하는 것이 더 귀하다 그렇게 여긴 아브라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예배 명령을 그대로 순종하였고 명령대로 제사하려고 묵묵히 모리아 산에 올라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국 그런 아브라함, 제사를 소중히 여긴 그 아브라함을 받으셨고 그가 어디로 가든지 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예배로 복을 받는 것을 옆에서 본 사람이 바로 조카 롯입니다. 하나님은 그 조카 롯에게도 엄청난 복을 주셨습니다. 결국 그들은 재산이 너무 많아서 갈라 섰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우리가 서로 나누자,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겠고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리라 라고 롯에게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을 떠나서 소알지방으로 갔고 이제는 더 이상 예배중심, 제사중심, 성전중심의 그런 것보다 돈중심, 명예중심, 사람중심으로 살면서 엄청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그 모든 것이 다 불타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부끄러운 패륜아 같은 사람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배를 떠나니 불행이 다가왔습니다. 이와 같이 신자가 예배를 떠나면 아무리 부자인 것 같아도 훌 날라가 버립니다. 아무리 높이 올라가고 권력을 잡는 것 같아도 어느 날 그 모든 것들이 다 훌 날아가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게 예배를 멀리하고 세속주의자로 살았던 롯의 교훈입니다.
청교도들은 예배회복을 위하여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신대륙을 향하여 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신대륙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맨 먼저 예배를 드릴 교회당을 세웠습니다. 자기 집을 짓기도 전에 예배당을 세우고 그 다음에는 후세들을 가르칠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살 집을 지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농사를 하여 첫 수확을 하면서 제일 먼저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면서 추수감사절을 지켰습니다. 지금도 미국은 매년 11월 3주가 추수감사제로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는 유명한 축제를 드리는 국가명절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아메리카가 제대로 복을 받았고 하나님 중심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제 건국한 지 불과 300년도 되지 않은 나라가 세계 제1의 막강한 부강한 국가가 되도록 엄청난 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미국이 이제 서서히 병들어 가고 있다는 분석입니다. 그토록 축복받은 미국이 세상 향락에 이끌리어서 다시 예배를 무시하고 개인주의, 인간중심의 인본주의, 세속주의로 동성애를 인정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타나는 현상은 교회가 텅텅 비어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축복도 미국에서 서서히 떠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어느 미국인은 탄식하기를 우리 증조부들은 주일을 거룩한 안식일이라고 했는데 조부들은 그냥 안식일이라고 했고 아버지 때는 그냥 일요일이라고 하였고 오늘날 우리는 그냥 휴일이라고 부른다라고 탄식하였습니다. 이렇게 미국이 세속화되고 타락하여 가고 있는 중입니다. 주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예배를 얼마나 귀히 여기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사람이 결정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결정되기도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예배자를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영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3,24절,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찌니라”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는 영으로 예배하는 자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영적이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물질이나 육체로 이뤄지신 분이 아니라 신령한 영적이신 분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배자들도 육신이 와서 잇다 그래서 예배자가 된다 그게 아니라 영적인 신령한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배자리에 앉아 있다고 다 예배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을 열고 찬양을 드린다고 다 예배자가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말씀을 듣는다고 다 예배자가 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보시기에 신령한 영으로, 즉 영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영이란 영원한 존재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교제매체입니다. 하나님이 영적이신 분이시기에 우리도 우리의 영으로 예배를 하여야 합니다. 영적인 예배란 형식중심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형식주의를 배격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그 중심을 아주 귀하게 보시는 분이십니다. 예배에는 장엄하고 거룩한 형식도 있어야 하지만 그러나 형식주의 나 형식주의자가 되면 안 됩니다. 형식주의자는 다른 말로는 외식주의자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미워하시는 대상이고 때로는 저주까지 하신 대상이 바로 이런 형식주의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위선자라고 강력하게 선포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신앙형식주의를 아주 경멸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가 형식적인 예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형식적으로 기도하고 형식적으로 찬양하고 형식적으로 설교를 하고 또 형식적으로 그 설교를 듣고 그러면 안 됩니다. 형식적으로 헌금하고 성도들 간에도 이런 형식적으로 인사하고 교제하면 안 됩니다. 이런 형식적으로 하는 일들을 가지고 현대인들은 영혼 없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렇습니다. 영혼 없는 예배, 영혼 없는 한금, 영혼 없는 찬양이 안 되고 영혼 없는 설교도, 영혼 없이 아멘하기만 하여도 그것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령으로, 영적으로 깊이 교제하고 깊이 아멘하는 그런 예배여야 합니다.
신령한 예배는 한마디로 성령님과 함께 하는 예배입니다. 성령님이 임재하시고 인도하시며 은혜를 주시고 충만하게 역사하시는 그런 예배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는 예배,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쓰는 그런 예배가 아닙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셔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간절히 소망하는 예배, 하나님이 받으시고 인정하시는 그런 예배여야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배드리는 사람들의 중심이 사람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그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중심으로 드리는 그런 예배자로 서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런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올 때는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리고 그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려고 오셔야 합니다. 예배자가 교회에 와서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중심이 되어선 안 됩니다.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오셔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찬양하고 그리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사람을 바라보면 실망합니다. 사람을 보면 낙심합니다. 저도 주일마다 설교를 합니다만 어떻게 하든지 이 강단에서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안하려고 노력합니다. 인간 최목사는 간 곳없고 오직 예수, 오직 예수 그렇게만 되려고 그래서 기도하고 그래서 가운입고 그래서 지금도 겸손하려고 노력합니다. 예수님만 나타내려고 하나님만 나타내려고 정말 정말 노력합니다. 여러분들도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 앞에 서세요, 하나님 앞에 세우세요. 그 앞에서 바르게 서는 것이 우리 하나님이 찾으시는 신령한 예배자입니다.
3.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3,24절,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찌니라”
진리로 예배한다는 진리를 영어로는 Truth입니다.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반대말로는 거짓이며 허위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실 뿐 아니라 진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진실한 마음이 없이 거짓으로 찬양하고 거짓으로 기도하고 거짓으로 설교하고 거짓으로 아멘하면 진리의 하나님이 그 예배를 받으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배자는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찬양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헌금하고 진실한 설교를 들으면서 진실한 마음으로 아멘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자가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의 예배를 정말 가만히 냉정하게 분석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진실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십니까? 예배자가 예배 중에도 열심히 핸드폰 들여다 보고 열심히 딴 생각을 하고 열심히 자기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는 자들은 없습니까? 예배가 어서 빨리 끝나야 내가 어디를 가는데, 왜 오늘 따라 설교가 이렇게 길까라고 불평하지는 않습니까? 예배가 마치기만 하면 어디 가야지 그렇게 마치 운동장에서 달리기 경주자들이 출발신호를 기다리듯이 대기하는 그런 사람들은 없습니까? 정말 진심으로 집중하여 예배하여야 진리로 예배하는 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진짜 강대상에서 보면 찬양을 따라 부르지 않는 사람들도 여전히 여러분들이 계십니다. 진짜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정말 안타까워요, 이 귀한 시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와서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데, 우리가 하나님 전에 모여서 함께 예배자로 있는데 여전히 마음은 찻집에서 누굴 만나요, 등산길에서 누구와 같이 걸어요, 아니면 운동장에서 무슨 운동을 하고 있어요, 그럽니다. 영혼 없는 예배자입니다. 진실이 없는 예배자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런 진리로 예배하는 진리의 예배자와는 거리가 먼 예배자들입니다.
4. 희생의 예배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배는 영어로 ‘제사’ 즉 ‘Sacrifice’ ‘희생’이란 의미입니다. 구약의 모든 예배는 희생제물을 가지고 드렸습니다. 소나 양, 염소 또는 곡식으로 반드시 희생의 제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에는 반드시 희생이 있어야 하였고 제사에는 반드시 제물이 따라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희생이 제사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는 반드시 정성도 들어가야 하고 희생도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자가 되는 법입니다. 아무런 희생이 없으면 그건 제대로 드리는 예배가 되지 못합니다. 희생없는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가장 귀한 예배자의 자세는 구약에도 잘 나타나고 또 신약에도 정확하고 분명하게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신6:4,5절,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역시 신약에도 마22:37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게 가장 귀한 예배자의 자세입니다. 정성없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습니다. 희생없는 예배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것이 예배자의 바른 자세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예배하려면 정말 여러가지를 희생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희생하지 않으면 결코 예배를 드릴 수가 없어요, 내가 할 일 내가 볼 일을 다 하면서 예배자리에 나올 수도 없고 예배자가 되지도 못합니다. 주일예배를 한 번 드리려면 우선 시간을 드려야 하지요, 그리고 이 예배당으로 오셨어야 하지요, 또 오기 위하여 세수하고 여자분들은 화장하여야 하구요, 그리고 성경찬송가를 찾아서 들고 와야 하지요, 교통수단으로 자동차를 몰고 오든지 대중교통을 이용하든지 그래야 올 수 있지요, 또 헌금하여야 하지요, 여러 가지를 희생하고 오는 것이 한 예배자리입니다. 지난 주 오후에 지하 주차장에 가서 보니까 자동차가 가득 차서 자동차 한 대 주차할 여유가 더 없더군요, 그런데 늦게 오시는 분들이 차를 몰고 왔다가 주차자리를 못 찾으면 그것도 기분이 별로일 것 같아요. 그때 감정처리도 잘 하셔야겠어요. ‘에이 이런 주차할 곳도 없는 이런 교회에 와야 하나?’ 그러다가 핸들 꺽지 마시고 잘 찾아 보시고 주차봉사자들에게 도움도 받고 그것도 역시 감정의 희생입니다. 그렇게, 그렇게 희생하여야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일 날에 할 일들을 잡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일은 온전히 예배하는 날입니다. 등산 간다거나, 낚시 간다거나 골프하러 간다거나 괜히 지방에 간다고 자꾸 예배 자리를 비우고 그러지 마세요. 하나님이 다 보시고 계십니다. 그걸 다 계산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일은 낮예배만 아니라 오후예배도 제대로 바르게 드려야 합니다. 낮예배만 드리면 절반만 예배를 드리는 일입니다. 수요예배도 드리고 공예배입니다. 예배를 제대로 드려야 제대로 된 신앙인입니다. 이것 저것 바쁘다고, 일 많다고 다 빠지고 피하고 그러면 그건 바른, 온전한 예배자가 못되는 것입니다. 생활의 패턴을 바꾸세요, 예배중심으로 변화해야 제대로 된 예배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온전한 예배자들을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지금의 세대는 인본주의가 판치는 세대입니다. 하나님 중심에서 나 중심, 내 가족 중심, 즉 사람중심의 시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인본주의자가 아닙니다. 신본주의, 하나님 중심주의, 신앙주의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과 제가 이런 예배자로 올곧게 세워지기를 축복합니다.
예배는 제사입니다. 제사는 ‘Sacrifice’ 즉 ‘희생’이란 의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배 드리기 위하여 희생하세요, 손해보세요, 나를 내리세요, 인본주의,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꾸어 가세요. 그래야 희생할 숴 가 있고 그래야 그 희생으로 예배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희생의 예배자를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스룹바벨을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보내셔서 스룹바벨 성전을 짓게 하신 하나님은 유다백성들이 예배를 드리는 것을 기다리셨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아닥사스다 왕궁에서 편안하게 잘 지내던 느헤미야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보내신 하나님은 유다사람들이 안정된 예루살렘에서 예배자로, 제사 드리는 자로 반듯하게 세워주시려는 의도였던 것입니다. 여러분들과 우리를 이곳에서 안전하게 살도록 하시는 것도 오늘날 우리를 이 세상에서 바른 예배자로 세워주시고자 하심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노아는 홍수를 통하여서 살아난 사람입니다. 그 노아가 홍수에서 벗어나 방주에서 나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바로 여호와ㅔ 제단을 쌓고 정결한 새로 재물을 삼아 번제를 드린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 향기를 받으시고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라라고 결심하셨고 그리고 무지개를 약속으로 주셨던 것입니다. 바른 예배자를 만나시면 하나님이 오히려 감격하십니다. 그리고 은혜를 쏟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28장에는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서 밧단 아람으로 도망을 갑니다. 가다가 벧엘에서 꿈을 꿉니다. 그리고 꿈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잠이 깨고 제일 먼저 베고 자던 그 돌베개를 단으로 하여 제사를 드립니다. 루스가 변하여 벧엘이 되었습니다. 그 벧엘의 제사에서 하나님이 그를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그 야곱이 가는 곳마다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20년 세월이 지났습니다. 하나님은 그 예배자 야곱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창31:13). 이렇게 20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여전히 그 예배자를 기억하시고 반기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역시 제대로 된 예배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맺음:
시편 14편을 보면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다고 하십니다. 즉 바른 예배자가 있는가를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제대로 된 예배자가 별로 없습니다. 3절에는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제대로 된 예배자가 하나도 없다는 탄식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제대로 된 예배자들을 찾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바른 예배자들, 그러한 대상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0:25절에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강력하게 권면합니다. 말세에는 모이기를 폐하는 자들이 많이 많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초대교회 교인들처럼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2:46) 그렇게 뜨거움으로 모이고 예배를 세워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축복합니다.
예배를 세워라, 예배를 제대로 잘 세워라. 이것이 우리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에게 강력하게 주시는 메시지이십니다. 믿음으로 잘 받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