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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대예배 설교
Sun Nov 19 2017 02:00:00 GMT+0000 (Coordinated Universal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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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칭찬받은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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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눅17:11~19
지난 주 수요일에 포항에서 발생한 강도 5.4의 지진으로 인하여 온 나라가 야단하는 한 주간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지진으로는 지난 해 9월에 경주남부에서 발생한 5.8 강도의 지진 이후 두 번째로 높은 강도의 지진이라고 하고 특히 이번에는 진원지가 바로 포항시 지역이어서 더더욱 놀라고 피해도 큰 것 같습니다. 이 지진으로 사상초유로 대입수능이 일주일 연기가 되고 헝클어지고 뒤엉키고 온통 난리입니다. 수능 출제위원들과 관계위원 등 700여 명이나 되는데 그분들도 30여 일을 ‘감금’생활을 했는데 일주일 더 연금되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더 이상 지진발생의 안전지대가 아니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 화요일 저녁 다니엘 기도회 때 이 본당의 저 빔 프로젝트가 전원이 나가서 화면이 전혀 나오지 않는 방송사고가 났습니다. 그래서 참여한 성도님들이 평소예배와 반대로 강단 주위에 모여 앉아서 뒤돌아서 저 벽에 걸린 작은 모니터를 보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강단 주위에 죽 둘러 안아 보니까 영 새로운 분위기여서 즐겁기도 하였습니다. 또 일부는 성가대석에 앉아서 예배하였고 저 앞의 장의자 몇 개는 뒤로 돌려놓고 감ㅌ이 예배하는 진풍경이었습니다. 다행히 다음날은 잘 고쳐서 지금은 제대로 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 동안 아무런 문제가 없이 예배드리고 지낸 날들이 무척이나 감사하였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여 보면 평소에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를 알게 됩니다. 사실 감사란 어떤 어려움에서 건짐을 받은 것도 틀림없는 감사이지만 그러나 더 감사한 것은 아무런 사고 없이, 아무런 문제 없이 평안하고 잘 지나가는 그런 일상이 무척이나 감사한 것입니다. 아무런 일이 없다, 그저 무사한 날들이다, 그게 기적이고 그게 너무나 감사한 일들입니다. 우리가 그걸 모르는 것입니다. 무슨 엄청난 사고에서 건짐을 받아야만 감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추수감사주일입니다. 무엇을 감사하여야 할 것입니까? 혹 금년에 특별히 엄청난 문제들 속에서 건짐을 받고 특별하신 만져 주심을 경험하지는 않으셨나요? 지진으로 이 땅 한 곳에서는 두려움과 불안속에서 지금도 고생을 하고 있는데, 수능까지도 연기되고 국가적으로 야단인데 그런데 우리는 별다른 문제도 없었고 사건사고도 없었다, 그래서 감사하다, 그런 감사도 정말 진심으로 감사하며 드려야 하는 감사입니다. 그래서 1년에서 한 주일을 구별하여서 추수감사주일예배로 드리면서 이렇게 감사도 드리고 이런 곡식, 야채, 과일 등으로 예배도 드리고 감사하고 하는 그러한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가시는 중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 한 마을에서 나병환자들이 모여 사는 곳을 지나게 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도움을 요청하자 예수님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라고 진단해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그 나환자들이 제사장에게로 가다가 갑자기 모두가 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입니다. 고침을 받은 나병환자들은 당연히 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1명만이 돌아왔고 그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감사하였다가 예수님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예수님이 그 사람을 칭찬을 하신 것입니까? 그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에 믿음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감사
15절,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0명이 함께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제사장에게로 가다가 갑자기 자기가 나은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정말 너무나 놀라운 기적이요 엄청난 역사였습니다. 정말 기적 가운데 이런 기적이 어디 있겠어요? 이 사마리아인도 너무너무 놀랐을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나에게 이런 기적이 나타나다니, 이런 행운이 어디 있고 이런 감사할 일이 어디 있겠어요? 정말 기적이요 역사인데 그게 나에게 일어나다니, 너무나 감격이요 너무나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그 순간입니다.
그러자 나타난 현상들이 두 가지였습니다. 갑자기 놀라고 놀라던 그 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그대로 자기 길로 갑니다. 왜요? 우선 예수님이 가르치신 그대로 제사장들에게 보여야 하는 일입니다. 구약 레위기 14장은 나병은 제사장이 진찰하도록 명하였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이 나병이 나았는지 계속되고 있는지를 보고 판단하고 그 판단에 따라서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못 돌아가고를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제사장에게로 가서 네 몸을 보이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길을 가다가 그만 나았습니다. 제사장에게 보이고 이제 어서 빨리 이 지긋지긋한 나병환자생활을 청산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침받은 그들 아홉 명의 환자들은 자기 길로 그대로 갑니다. 제사장에게로 어서어서 가자 그리고 달려갑니다. 제사장의 완치판정을 받으면 그러면 집으로도 갈 수가 있게 됩니다. 신나게 제사장에게로 달려갑니다. 어서 가족으로 달려가고 친척과 친구에게로도 달려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고 그리고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을 너무나 당연한 걸음입니다. 너무너무 신나고 감격하는 뭐라고 말할 수가 없는 그런 마음들입니다. 세상에 이런 기적이 있다니, 그리고 이런 기적이 나에게도 일어나다니, 세상에, 세상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 그는 달랐습니다.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럴 수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그는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나타난 글이 다음 문장입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그는 분명히 나은 것은 자기 자신이지만 그러나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먼저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낫기는 자기가 나았는데, 내 병이 고침받은 것, 이 사실보다 먼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하나님을 생각하고 영광돌리는 것, 이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낫기는 자기가 나았지만 이렇게 고쳐주신 그분, 그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그렇습니다. 이 기적을 자기에게 제공하신 그분, 그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돌아온 사마리아인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이 돌아온 사람이 다른 제 길로 간 9명의 사람들과 다른 차이점 한 가지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건 바로 이것입니다. 9명의 사람들은 나병과, 그 나병이 나은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이제 병이 나았고 나는 고쳤고 이제는 깨끗한 사람이 되었고 정상적이 되었고 그렇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자기를 보고 자신들이 고침을 받은 그 사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인 환자는 그들처럼 그 사실 보다가 그 사실 뒤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그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이게 차이입니다. 9명과 1명의 차이가 바로 이것입니다.
신앙이 뭐냐? 그건 간단합니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현상을 보고 그걸 귀중하게 여기고 무게를 두는 게 아니라 내 병을 고치신 그분, 그분을 바라보는 것, 이게 신앙입니다. 만약에 병이 나은 우리, 병고침을 받은 우리를 바라보고 판단하고 생활하면 그건 불신앙입니다. 그러나 우리 뒤에 계시는 그분을 보고, 그분을 찾으면 그건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병 나은 사람을 바라보면 안됩니다. 그 병을 낫게 하신 그분을 먼저 보는 게 제대로 된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뒤에서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제대로 된 신앙인입니다. 신앙은 현상을 보는게 아닙니다. 현상 뒤에서 역사하시는 그분을 보는 것입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행3:12,15절,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사도행전 3장에서 성전미문의 앉은뱅이를 고치고 난 베드로가 백성들에게 외친 말입니다. 그 앉은뱅이 병자를 고치신 분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 그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보면 안됩니다. 고침받은 자를 보라는 게 아닙니다. 그분을 고치시고 그분을 낫게 하시고 그분을 일으키고 걸어다니게 하고 뛰어 다니게 하신 그분, 그분을 바라보아야 제대로 된 신앙입니다. 이와 같은 것입니다. 이제 병을 고치시고 다스리신 그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붙잡고 계시며 다스리시고 인도하시고 섭리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온 우주의 주권자요 주관자이십니다. 그분이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을 높이고 그분을 세우고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께 감사하고 그분을 찾는 게 성경적 신앙입니다. 주님은 그 신앙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현상을 보지 않고 그 현상을 일으키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바른 신앙이요 칭찬받은 감사인 것입니다.
2. 엎드려 하는 감사
16절,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그는 바로 돌아와서 자기를 고쳐주신 예수님 발 아래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고쳐주심에 대하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야말로 최상의 겸손입니다. 나를 고치신 그분, 나를 살리신 그분께 내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정성으로 감사를 표현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으로 자기들을 고쳐주신 위대하신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위대하신 예수님의 발 앞에 몸을 굽히고 엎드려서 감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엎드려 드린 감사입니다.
물론 이 사마리아인도 예수님에 대하여 어느 정도는 들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위대하심, 능력의 분, 죽은 자도 살리시고 말씀 한마디로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고 새롭게 하시는 그런 능력의 주님이심으로 알았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의 말씀대로 가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러 갔을 것입니다. 가다가 길에서 자신이 깨끗하게 고침 받은 사실을 보고 바로 예수님께로 돌아와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엎드려 감사를 드렸을 것으로 보입니다.
엎드려 하는 감사는 최상으로 공경하며 감사하는 그런 감사일 것입니다. 더 이상의 감사는 없다, 그런 자세로 상대에게 올리는 최상급으로 드리는 감사를 표현하는 감사입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그런 마음과 그런 자세로 자기의 나병을 깨끗하게 고쳐서 낫게 해 주신 예수님께 최상의 마음을 담아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엎드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으로 드리는 감사는 이렇게 정중하게 그 발 앞에 엎드려 드리는 감사입니다. 생각해 보면 자기들을 만나주신 예수님께 너무나 감사하여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나병을 고쳐주시고 새 삶의 길을 열어주신 그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세상에 이런 감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엎드린 것입니다. 나를 만나주신 감사, 나를 고쳐주신 감사, 나에게 새 삶의 길을 활짝 열어 주신 그 감사, 그게 너무나 감사하여서 드린 감사입니다.
요즘 교계에선 소위 ‘뜨는’ 동영상이 있습니다. 이정훈(43) 울산대 법학과 교수의 ‘동성애와 이데올로기’ 유튜브 강좌입니다. 2주 만에 10만 명 넘게 시청하면서 강의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초등학교부터 ‘반야심경 해설서’를 볼 정도로 종교철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서울 동대부고를 나와 1993년 동국대 불교학과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했다고 합니다. 대학 2학년 때는 머리를 깎고 출가했습니다. 이 교수는 신자유주의와 타락한 자본주의로 고통받는 사회를 사회주의적으로 개혁하고자 법철학을 연구하다가 “교회는 없어져야 할 ‘원수’처럼 보였다”고 회고했습니다.
서울대 법학대학원에 들어갔다가 1999년엔 군종장교(군법사)로 임관했고, 포교를 위해 군법당을 건축했습니다. 군종장교 전역 후 환속하여서 사회를 개혁하려고 하면서 ‘걸림돌’인 교회를 깨기 위해 장 칼빈, 칼 바르트 등의 책을 탐독했다고 합니다. 2005년 ‘정치와 종교의 분리’라는 것을 기치로 내 세우면서 종교자유정책연구원, 이른 바 우리에게 그 치가 떨린다고 하는 그 유명한 ‘종자연’을 기획하여 설계했으며 이 종자연의 산파역할을 했습니다. 종자연은 ‘종교의 자유도 인권’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민사소송과 입법청원, 헌법소원심판청구, 진정, 신고 등으로 한국교회를 종교편향 집단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리고 고속도로에 설치된 고려은단의 ‘Jesus loves you’ 광고판을 제거하였고, 공립학교 내 종교활동 금지시켰으며, 공무원의 종교적 중립을 강화하였고, 교회 내 투표소 설치 반대 등을 관철시켰습니다. 학내 종교자유를 쟁취하겠다며 기독교학교인 대광고등학교 강우석 군 사건을 이슈화하여서 더 이상 예배와 기도를 하라고 강조하지 만들었고 이 사회에 기독교색체를 탈색시키고 기독교를 핍박하는 일을 공공연히 이슈화하는 일에 최선두에서 전력을 다하여 실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성공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2007년 여름 어느 날에 기독교 공격의 ‘포인트’를 잡으려고 교계 방송을 시청하던 중에 한기채 서울 중앙성결교회 목사의 설교가 방송에 나왔습니다. 설교제목이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였습니다. 듣자마자 ‘아이고, 쇼하네. 너나 잘 하세요.’라고 조롱하려던 순간 이교수의 혀가 굳어버렸습니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강력한 전류가 흘러내렸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고꾸라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변화되었고 그리고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직접 부르시고 뜨겁게 만나 주신 것입니다. 기독교를 모질게 핍박했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를 만났듯이 그의 삶은 극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십자가만 봐도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습니다.
그는 지금 우리 사회에 기독교를 집중적으로 성토하는 집단들이 있다고 강조하는 사람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입만 열면 기독교를 욕하고 교회를 욕하고 목회자들을 욕하고 핍박하는 잘못된 이데올로기로 예수를 밀어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정훈 교수는 한국교회를 혐오하는 현상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점검하고 이를 깨는 일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교수의 마지막 부탁은 순교신앙의 재무장이었습니다. “지금은 순교신앙으로 무장해야 하며 한 발짝도 물러서면 안 될 때다. 위기는 기회”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놓치면 영국처럼 영적으로 황폐화되는 수준을 넘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붕괴마저 우려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며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기독교의 파워로 반전을 일으킬 때”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만난 이 교수는 이제 주님 발 앞에 정중하게 엎드려 감사를 드리는 사람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자기들을 만나주신 예수님께 너무나 감사하여서 드리는 감사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부르시고 나를 만나주시다니, 세상에 이런 감사가 없습니다. 그래서 엎드린 것입니다. 나를 만나주신 감사, 나를 고쳐주신 감사, 나에게 새 삶의 길을 활짝 열어 주신 그 감사, 그게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그래서 엎드리고 그래서 아멘하는 것입니다. 이런 감사가 여러분들과 저에게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칭찬받은 감사는 엎드리는 감사입니다. 최상의 감사를 정성으로 표현하는 감사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려주시고 구원하여 주신 그 감사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돌아온 사마리아인도 마찬가지로 나를 살려주다니, 나를 그 지긋지긋한 나병에서 깨끗하게 고쳐주시다니, 그래서 돌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엎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에 선 욥도 엎드렸습니다. 욥기1:20절,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요한계시록 4장에도 보면 천상에서 구원을 받은 장로들이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면서 14절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찬양하고 진정으로 감사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3. 남들과 다른 감사
17,18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이 사마리아인 나병환자는 혼자서 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나병환자 동료들 10사람이 같이 가다가 자기들의 몸에 가지고 있었던 그 지긋지긋한 나병이 깨끗하게 고침을 받아서 이제 그 천형의 벌에서 고침을 받아서 정말 신나고 신이 났었습니다. 그리고는 어쩔 줄 모르면서 9명은 그대로 제사장에게 자기의 몸을 보이려고 가던 그 길을 그대로 달려서 갔습니다. 정말 예수님의 말씀처럼 제사장들에게 보이려고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그 길로 달려 갔습니다.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발걸음이요 제 길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 한 사람, 이 사마리아인은 혼자서 되돌아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려고 혼자서 되돌아왔습니다. 남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는데 감사를 드리려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라고 탄식하시듯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찌 혼자만 왔느냐?’라는 탄식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혼자서 온 그 감사, 그 감사가 그게 무척이나 귀하다’라는 선포이시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가는 그 길에서 혼자서 되돌아와서 드리는 사마리아인의 감사, 이것이 주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주님을 흐뭇하게 하였고 미소로 웃음 짓게 하였고 그리고 칭찬하게 하셨습니다. 사마리아인 혼자서 드린 감사, 많은 사람들이 가는 그 길에서 돌아와서 혼자서라도 하나님께 제대로 엎드려 감사하겠노라고 하는 그 겸손한 신앙, 이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좁은 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다 가는 넓은 문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이 길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요 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은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그 길로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힘들어도, 고독하고 외로워도, 지쳐도, 아니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그래도 그 좁은 문으로 좁은 길로 가려고 힘쓰고 애를 쓰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 즉 <잠언 31장>이란 책으로 유명한 저자이며 세계적 건축설계회사 팀하스(TimHass) 하형록 회장의 자전적 에세이가 <페이버(favor)>라는 책으로 나왔습니다. 이 책은 1991년 32세의 나이에 고속도로 한가운데서 심실빈맥으로 의식을 잃는 순간부터 시작된 하형록 회장의 특별한 깨달음에 관한 자전적 에세이입니다. 최고의 주차빌딩 건축 설계 회사인 워커사에 입사해 스물아홉의 나이에 중역의 자리에 오를 정도로 성공가도를 달렸던 그는 아내와 두 딸을 둔 사람으로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고, 그러한 삶이 영원할 것만 같았는데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와서 1991년 10월, 고속도로 한가운데서 의식을 잃고 말았다고 합니다. 심실빈맥! 심장이 불시에 빠른 속도로 계속 뛰어 죽을 수도 있는 무서운 병이 찾아온 것입니다.
서른세 살의 젊은 나이에 생사를 오가는 지경에 처한 그는 2년 간 생명을 위협하는 절박한 위기의 순간들을 필사적으로 넘기면서 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2년 만에 드디어 그가 이식받을 심장이 나타났고 그에게 남은 날은 1주일에서 1달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하필, 이식받지 못하면 이틀을 넘기기 힘든 여성 환자가 옆방에 있다는 소리를 들게 됩니다. 하지만 두 번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를 그 하늘이 준 ‘기회’를 그 심장이 필요한 사람을 모른 척할 수가 없어서 “그녀에게 이 심장을 주십시오”라고 양보하여 주었다고 합니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어야만 그 길이 바로 좁은 길입니다.
그런데 이 하형록 회장이 쓰러진지 한 달만에 기적적으로 그에게 맞는 또 하나의 심장이 나타났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그는 하나님의 '페이버(favor), 즉 은혜와 은총을 또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게 희생을 원하셨습니다. 그 희생이 있었기에책이 나올 수 있었고, 과 회사 팀 하스를 통해 많은 간증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그때 하나님의 <페이버>를 받았기에, 친구들도 제 이야기합니다. “네가 성공한 건 잘 나서도, 능력 있어서도 아니다. 그때 심장이식을 양보한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기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즉 좁은 길로, 남들이 가지 않는 그 길로 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 앞에 남들과 다른 나만의 감사를 드리는 길입니다.
모세는 하고 싶은 것은 하나도 하지 못하고, 그저 하나님께 순종하고 희생했습니다. 바로 왕 때문에 앞길이 막막한 상태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 수 있느냐고 물을 때 ‘만약에’라는 조건을 붙였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그저 ‘은혜를 베푸셔서’라고 돼 있습니다. 그냥 달라는 것 같지요, 하지만 그들은 축복을 받기 위해 조건적으로 매달렸습니다. 남들과 다른 자기만의 기도와 감사로 하나님께 요구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자기만의 경험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앞에 나오는 성도들에게 그 자신의 희생이 있으면 그걸 보시고 그를 기억해 주십니다.
예수님도 죽지 않으시고 부활하실 수 없었을까요?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셨습니다. 희생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희생하라는 것입니다. 물질과 시간을 희생하라.이 강조하는 것도 그것입니다. 회사에서 희생하라. 어떤 결정을 할 때, 자신이 희생하는 쪽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당장은 손해보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것 때문에 2-4배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욥도 그러했습니다. 갖은 고생을 겪었지만, 결국 그의 재산도 몇 배로 늘어나지 않았습니까." 나만의 희생, 나만의 신앙생활의 길, 그것이 있어야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말씀이요 그런 의미입니다.
기독교는 감사의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감사생활이 제대로 잘 정립된 사람은 신앙의 기본이 제대로 잡힌 그리스도인이요 감사생활이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은 신앙의 기본이 제대로 되지 아니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것은 우리의 환경이 좋아졌다거나 물질의 풍요로움이 생겼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요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거듭났다는 것이요 구원받아 영생을 소유한 인물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내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이 감사는 우리 속 깊은 데서 진심으로 우러나는 감사로 이 감사에 대하여 구원받은 사람들은 늘 찬양하며 기도하며 고백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나만의 길로 하는 감사의 삶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예배도 감사의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찬양도 감사찬양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하며 기도하며 예배드리며 생활하며 살아가는 신앙, 그런 모습을 우리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인의 가장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감사하며 살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넘치는 은혜로 채워 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감사에 감동하시며 감사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감사신앙은 원망과 불평과 소극적인 것들을 적극적으로 바꾸고, 부정적이고 짜증스런 것들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바꾸고 변화시키는 신앙입니다. 감사신앙의 가장 밑바닥에는 바로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감사로부터 시작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되지 아니하는 상황이 닥쳐와도 생각의 뿌리를 믿음에 두고, 하나님 섭리를 믿는 신앙에 두고, 그 삶을 감사에 근거를 두고 있는 사람입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받아들이고 이해를 하자 그 자신의 마음에서 진정한 감사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웃나라 장사군들에게 자신을 종으로 팔았던 형들에 대하여서도 긍휼의 마음으로 용서할 수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것이 감사의 능력입니다.
그저께 다니엘기도회에 강사로 오신 인도의 사티쉬쿠마르목사님은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그 목사님은 2005년 25명의 교인과 함께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개척 5년 후에 출석 8만 명 교회로 성장하였고, 10년 만에 10만을 넘어 현재는 18만 5천 명이 예배를 드리는 엄청난 교회로 성장했다고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한 교회로 유명한 인도의 갈보리템플이라는 말입니다. 지난 12년 동안 이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사티쉬 쿠마르 목사가 17일 금요일에 한국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특별세미나에서 ‘교회 성장을 위한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습니다.
이날 수많은 목회자들이 모였는데 교회개척 12년 만에 1만 8천 명도 아닌 18만 5천 명이라니. 도대체 이 초대형교회의 성장 비결은 무엇일까? 세미나에 참석한 목회자들의 눈과 귀가 쿠마르 목사의 입술로 모아졌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교회 성장의 비결이라며 전한 메시지는 기도와 말씀, 그리고 성결한 삶이었다고 합니다. 솔직히 목회자라면, 이 세 가지에 대해 모를 리가 없을 것입니다. 지극히 단순하고 기본적인 것이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던 것들이 아닌가? 하지만 쿠마르 목사는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기도와 말씀, 성결한 삶의 능력을 정말 체험하고 있느냐고?
그는 먼저 ‘듣는’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쿠마르 목사는 “바쁜 일상으로 인해 하루 중 기도하는 시간 자체도 많지 않거니와 그나마 기도를 할 때도 우리는 흔히 내가 할 말만 하고 마친다”며 “기도가 우리와 하나님의 대화라면, 하나님 역시 우리에게 하시길 원하는 말씀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비로소 말씀하시려 할 때 기도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때가 많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기도의 진짜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나타난다고 그는 역설했습니다. 자신도 하나님께 지금과 같은 교회의 성장을 구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기도하던 중 하나님께서 그런 뜻을 말씀하셨고, 결국 그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맺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