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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대예배 설교
Sun Mar 04 2018 02:00:00 GMT+0000 (Coordinated Universal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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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빛을 받은 후에
본문 :
본문: 히 10:32-39
천국가는 과정에 있는 우리들에게 커다란 의문점이 하나 있는데 그건 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는 그대로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시지 않고 광야길을 걸어 가게 하셨을까라는 이문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그 고생을 하고 이끌어 내시고는 그들을 광야에서 죽게 하셨단 말입니다. 그러시려면 왜 그들을 이끌어내셨을까 차라리 그대로 애굽에 두시지, 민수기 11:5절에 기록된 그들의 고백처럼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그렇게 살도록 두시지 왜 이끌어 내시고는 죽게 하셨을까 그런 의문이 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받고 째까닥 천국으로 들어가면 세상에서 이 고생을 않고 그대로 천국 입성하는 건데 왜 이대로 두시나, 그리고 이 고생하게 하시나 라는 의문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미리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8장 2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라고 가르치시며 그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그 이유입니다. 네 마음이 어떠한지 시험하시고 그 시험의 결과입니다. 3절,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의도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길에서 고생토록 하셨느냐, 그걸 설명합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뜻이 담겨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냥 그대로 굴러가게 버려 두심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신8:5-6절,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보세요. 이 과정이 하나님을 더 잘 믿고 경외하도록 하는 과정이었다는 설명입니다. 징계한다고 믿지 말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더 잘 믿도록 하시는 과정이었다는 설명입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바로 천국에 들어가면 받을 상이 별로 없어요. 그러나 이 광야길에서 차근차근 걸어가다가 하나님께 가면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바 상, 우리가 받을 상이 훨씬 더 많고 크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광야길을 걷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구입니까? 오늘 본문은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이전에 우리가 하나님의 빛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빛을 받고 그리고 이 광야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 그 이후”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과 저는 구원 그 이후의 길을 오늘도 걷는 사람들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빛을 받은 그 후에”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 고난의 큰 싸움을 이긴 자임을 생각하라
32절,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우리가 누구냐라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고난의 큰 싸움을 이긴 자들입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세속에 속하여 살던 자들인데 그런데 영적 전투를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주신 자들입니다. 그 고난의 큰 싸움에서 승리한 자들입니다. 이것을 잘 기억하라는 의미입니다.
유다서를 보면 모세의 시신 장례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의 영혼은 하나님이 올려 가시고 그 시체장례를 천사장 미가엘에게 부탁하셔서 미가엘이 그를 장례하고 있는데 그, 현장에 갑자기 마귀가 나타나서 그 모세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래서 천사장과 마귀의 일대 결투가 벌어지는 장면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장례를 두고도 천사와 마귀의 치열한 결투 끝에 천사가 이겨서 여러분들을 이곳으로, 구원의 자리로 인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역시 대단한 결투,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사람들입니다. 이런 댓가가 치러지고 난 뒤에 구원을 얻은 우리들입니다. 이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영적전투에서 결투의 장을 이겨 나온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온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으로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여기까지 왔고 하나님의 이끄심으로 그 고난의 큰 싸움에서 마귀를 이기고 어둠의 세력을 이기고 넘어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이렇게 나라는 존재는 시시하지 않은 대단한 인물입니다.
출19:4절,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하나님은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마치 광야의 독수리가 그 새끼를 날개로 받아서 옮기듯이 그들을 옮겼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독수리 날개로 옮기듯이 옮겨서 어둠에서 이 빛으로 옮겨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전에는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라고 빛 됨을 선언하십니다(엡5:8). 수렁에서 건지심입니다.
홍해바다를 마른 길처럼 만들어서 건너게 해 주신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광야길을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덮어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쬐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온갖 방해군들도 다 막아주시고 마침내 가나안으로 들어가도록 인도하시는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그런 구원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이라는 죽음과 대속을 치른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무지무지한 댓가를 지불하고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그런 구원입니다.
모세 장례의 그 현장에서 천사장과 마귀의 일대 결투가 벌어지던 것처럼 우리를 두고도 천사와 마귀의 치열한 결투 끝에 천사가 이겨서, 하나님의 손이 이겨서 우리를 오늘 이곳으로, 이 구원의 자리로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단한 결투,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사람들입니다. 오늘이 있기 까지 우리 앞에는 이런 댓가가 치러지고 얻은 구원이다, 독수리 날개로 새끼를 옮기듯이 옮겨 왔다, 이 놀라운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도록 합시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2.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35절,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그러므로 담대함을 잊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왜요? 그 엄청난 고난의 과정, 선택의 과정, 인도하심의 과정을 거쳐서 오늘 여기까지 온 존재입니다. 그러니 그 대단한 자부심, 그 구원에 대한 대단힌 긍지, 그걸 잊지 말라는 부탁입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을 이기고 넘은 사람들은 담대하여 집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담대해지고 강하여 집니다. 왜냐하면 훈련을 받았고 단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사람을 강하게 만들어 갑니다. 담대하게 만들어 갑니다.
그래서 요즘은 고난을 훈련하는 프로그램, 극기 훈련의 프로그램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 수련회도 공동묘지를 지나게도 하고 담력훈련을 통과하게도 합니다. 회사 입사를 하면 해병대에 보내서 훈련하게도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식을 가능하면 일찍이 국내 무전여행도 시키고 해외여행도 시켜서 나가서 부딪치는 일들을 하나하나 스스로 해결해 가는 기회를 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훈련하는 일입니다. 고난은 사람을 강하게 만들어 가고 어떤 어려움에서도 이기고 극복하는 실력자들로 세워가는 과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 이렇게 고난은 사람 만드는 과정입니다.
한 집사님이 아들 이야기를 하기를 아들이 달라졌데요, 아들이 군대에 갔다고 오더니 그 다음부터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스스로 곧 잘 일어나고 학교에 가는 것도 스스로 준비하고 그리고 잘도 가더래요. 이전에는 다 도와주었는데 너무 잘 하더래요. 군대에 갔다가 오더니 확실히 이전보다 생각도 달라지고 행동도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훨씬 더 성숙해지고 스스로 해결하여 가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는 군대에 갔다 와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대개 대도시에서 그야말로 개미 새끼 한마리 잡지 목하고 살던 사람들이 논산훈련소만 거치고 나면 뱀도 잡고 적도 잡는 군인용사가 되고 나라를 지키고 전투를 하는 강한 용사들이 되어 집니다. 고난의 훈련이 강한 용사를 만들어 갑니다.
요즘은 걷는 것을 훈련으로 하는 데가 많습니다. 제주도에 가면 제주 올래길이라고 6개의 코스가 있습니다. 짧은 코스는 7km에서 긴 것은 18km까지 다양합니다. 그런데 그걸 걷는게 결코 만만하거나 쉬운 길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 제주도 순례길이 육지인들에게 무척이나 인기입니다. 일부러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 까지 가서 그 길을 걷고 하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가는 추세입니다. 그런가 하면 스페인에는 800km의 산티아고 순례길이 있는데 그 순례길에는 반드시 배낭 8kg에다가 14kg, 혹은 21kg의 짐을 지고 40일 간을 걷는 코스입니다. 그 40일 동안 침묵하면서 걷는데요. 그걸 걸으려고 우리나라에도 방학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 무거운 짐을 지고 40일 간이나 걷고 또 걷고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런 길이겠어요. 그러나 걸으면서 배우고 걷고 나서 엄청 깨닫고 새로운 에너지를 받고 훈련이 되고 그러는 겁니다.
그런데 그 제주 올래길이나 산티아고 순례길이나 그 과정을 거치고 나면 사람들은 더 겸손해지고 동시에 담대하여 집니다. 왜요? 고생하면서 어려운 과정을 넘고 넘는 것입니다. 땀 흘리고 숨 막히고 그렇게 고생하고, 그렇게 하면 뒤에는 담대하여지고 자신감을 얻게 되고 그럽니다. 그러므로 빛을 받은 사람들은 담대하여야 합니다. 망설이고 주저하지 아니하고 담력을 가지고 앞으로 전진하며 나아갑니다. 망설이는 자는 제대로 전진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전진하는 데는 담대해야 전진이 됩니다. 신앙의 전진을 위하여선 담대해야 합니다. 용기를 가지고 담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강단을 통하여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생활에 적용하여 담대히 앞으로 전진하면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전진할 수 없고 앞으로 나아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은 담대함을 가지기를 권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담대할 수 있습니까? 누구에게나 두려움이 있고 염려할 것들이 있는데 어떻게 담대할 수 있습니까?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바로 우리가 빛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빛의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담대하기를 가르치셨습니다(요16:33). 주저합니까? 왜 우리가 망설이고 왜 우리가 자꾸만 전진하지 못합니까?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전진하고 앞으로 계속하여 나아가고 그리고 용기있게 자신 있게 전진하며 나아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요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분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이 놀라운 사실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모릅니다.
3. 신앙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36-37절,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빛을 받아서 구원받은 자들이 천국에 가기까지 꼭 필요한 것들이 있는데 그 중에 가장 큰 덕목 한 가지는 참는 것, 즉 인내하는 일입니다. 즉 천로역정, 이 신앙생활을 하는데서 제일 중요한 성공요소는 바로 인내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길은 한마디로 하면 참고 기다리며 인내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천로역정에는 곁길로 가고자 하는 마음들이 쉬지 않고 일어나고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빛을 받아서 구원받은 자라고 하더라도 이걸 참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하면 다 도중에서 탈락하고 말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의 사랑장인 고전 13장에서 사랑이 뭐냐라는 글을 씁니다. 거기는 “사랑은 오래 참고”로 시작합니다. 또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라고 사랑의 성격을 규정합니다. 이렇게 사랑은 3회나 ‘참고’ ‘참으며’ ‘견디느니라’ 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사람들이 말하는 그 기독교의 사랑이란 참고 참는 것이지 그렇지 못하고 성격대로, 감정대로, 그대로 다 해 버리면 거긴 사랑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온갖 고난을 다 당하시면서도 참고 또 견디고 기다리셨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구원의 길을 여셨던 분입니다. 본문은 그러므로 강조합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라고 강조합니다.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반드시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인내의 종교입니다. 그 인내로 구원을 이루는 종교입니다. 이것이 참된 기독교 정신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매사에 꾸준히 인내하면서 기다리는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일이든지 인내하지 못하면 결코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교회생활이나 신앙의 생활에서 우리를 기다리지 못하게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대개 조급합니다. 반응들이 너무 빨라요. 좋은 일에 대하여 반응이 빨라야 하는데 정작 필요한 일에는 반응이 느려서 기회를 놓치면서 반응하지 않아도 될 일에는 반응이 빨라서 일을 그르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인내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성경에는 참는 자가 성공한다고 가르칩니다. 어떤 때는 자녀들에게도 막 야단을 치고 싶은 데도 한번 참고 또 참고 그러다 보면 모든 일들이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역시 참기를 잘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디모데 전후 3장을 보면 말세의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딤후3:1,4). 그렇습니다. 너무나 정확합니다. 이게 말세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자기 사랑하고, 돈 사랑하고, 교만하고, .... 사납고, 조급하고“ 그렇습니다. 조급해요, 막 너무나 조급해요, 기다리지 못해요, 참아주지 못해요, 당장 뭘 해결해야 해요. 이게 말세 사람들의 징조예요.
그래서 바울사도는 말합니다. “이러한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 서라”고. 참지 못하고 인내하지 못하고 그리고 사납고 조급한 그런 사람들에게서 돌아서라는 이 경고와 권고의 말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 줍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부드럽고 기다리고 인내하며 차분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라는 권고입니다. 좀 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도를 걸으면서 차분히 신앙생활을 하라는 권고이기도 합니다. 신앙은 방방 뛰면서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아멘하면서, 감사하면서 하라는 권고입니다. 이 세대를 거스러 올라가면서 살라는 말입니다. 적어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래야 합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인내를 잘 하고 참기를 잘하고 수용하기를 잘하고 한마디로 엉덩이가 잘 붙어야 하고, 그래야 신앙의 전진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게 말세를 맞이한 기독교인들의 가져야 하는 신앙태도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인내할 수 있습니까? 인내할 수 있는 방법이나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걸 본문은 기록합니다. 그냥 인내하라, 참아라, 기다리라, 그렇게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근거를 주십니다. 그게 37절입니다.
37절,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이제 곧 주님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우리 주님이 재림하실 것이니 그러니 참아라, 인내하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천국가는 성도들이 인내할 근거는 우리의 주님, 우리의 신랑 그 주님이 오실 날이 멀지 않다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 모두가 다 나를 구원하여 주신 그 하나님 앞에 설 날이 잇는데 그날을 바라보면서 참으라 그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과 저는 잠시 후에 주님 앞에 설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곧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앞에 설 것입니다. 믿으세요, 인내하세요, 기다리세요. 아멘하세요.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
주님은 지체하지 않고 오실 것입니다. 곧 오십니다. 멀리 멀리가 아닙니다.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입니다. 그러니 못 기다릴 이유가 없습니다. 아멘입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4. 오직 믿음으로
38절,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천성길을 향하여 가는 순례자들입니다. 순레자들은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 믿음으로 걸어가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구원받고 천국을 향하여 가는 사람들은 오직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게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이게 구원받고 광야 길을 열심히 걸어가는 순례자들입니다.
빛을 받은 사람들은 믿음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오직 믿음으로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맡기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의지하면서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나에게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 주시리라는 확신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주님 믿습니다. 그러면서 묵묵히 앞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뒤를 돌아보거나 뒤로 후퇴하면 안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앞만 보면서 살았으면 될텐데 사단의 유혹을 받고 뒤를 보다가 그만 죄를 범하고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받은 아담이 언제나 하나님을 처다 보면서 교제하며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도가 살아가야 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과 직접 영적인 관계를 가지고 호흡하며 관계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날마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도록 소망하십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무덤에서 부활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으며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늘 앞을 바라, 고개를 들고 주님을 보면서 주님과 함께 전진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 길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에서 뒤로 물러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담대하게 앞으로, 앞으로 전진하며 나아가기를 소망하십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에서 계속하여 전진하면서 나아갑니까? 아니면 가다가 쉬고 주저앉고 그럽니까? 하나님은 뒤로 물러나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전진을 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전진하는 신앙인입니까? 아니면 뒤로 물러나면서 자꾸만 주저앉고 뒷걸음질 치는 사람입니까? 자신을 돌아보고 평가해 보고 자신을 세워가야 합니다.
욥의 고백으로 오늘 설교를 마치려 합니다. 욥기 23:8절,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맺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