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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대예배 설교

Sun Jul 01 2018 02:00:00 GMT+0000 (Coordinated Universal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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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제목: 나를 고백하면 됩니다.

본문 :

본문: 욥 42:1-6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라는 책이 있습니다. 2주 전에 말씀 드린 미국에서 일어난 사건인, 1999년 4월 20일, 미국 콜로라도의 덴버의 한 고등학교에서 두 남학생의 총기난사로 13명의 학생과 교사가 사망하는 충격적인 사건의 범인 해리스와 클리볼드라는 이 두 학생은 그렇게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바로 그 총기난사범인 딜런 클리볼드라는 학생의 어머니가 쓴 책, 그 제목이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입니다.

책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일반적으로 보통의 사람들은 흔히 나는 착한 편이요, 착한 사람이며, 피해자요, 좋은 나라에 동일시하는 습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는 늘 좋은 편에 속한 사람으로 단정한다는 말입니다. 혹 나쁜 나라, 가해자와는 단호하게 선을 그어 버리는데 뉴스로 접하는 사건, 역사 속에 일어난 일, 심지어 성경의 사건 속에서는 나는 그것과는 거의 상관없는 일, 나는 반드시 선한 편에 서는 사람이라고 단정하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눅18장의 성전에서 기도드리는 바리새인과 세리 중 나는 당연히 세리편이지 바리새인과는 아니다 라고, 바리케이트를 치고 손가락질이나 하며 살아온 사람으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습관처럼 나는 피해자요, 약자이며 착한 사람에 자신을 동일화한다는 것입니다.

총기사건이 나고 16년이 지나 이 책을 냈다는데 그 엄마의 말처럼 그는 이상한 가정이 아니었고 역기능 가정 아니고, 부모가 중독자도 아니고, 부유하지만 검소하고, 아이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특히 아이 교육에 부부가 같은 마음으로 함께 하는 평범하고 모범된 가정이었다는 것입니다. 흔한 '문제 아이 뒤의 문제 부모'라는 논리를 찾아보기가 어려우며 그런 가정의 아이가 무고한 친구들을 총으로 쏴 죽였으니 엄마 자신이 미칠 노릇이었을 것입니다. '악마가 되어버린 아들을 이해해 보려고 하는 피눈물 나는 헛수고'가 바로 이 책의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저자가 피를 토하며 하는 말은 '나는 너를 알지 못했다' 이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낳았고, 너를 지키며 길렀고, 공들여 너의 인격을 만들어 왔고, 대화했고, 기도했는데 그런데도 나는 너를 너무나 몰랐다는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를 잘 알지 못합니다.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것입니다.

욥기의 맨 마지막은 하나님의 준엄한 책망으로 마무리 됩니다. 욥기는 해석하기가 어려운 책입니다. 욥기는 총 42장의 긴 책입니다. 어느 날 욥에게 갑자기 10아이들을 다 잃고 동방 최대 부자의 재산들을 다 잃게 됩니다. 그리고 온 몸에 악창이 왔습니다. 이런 소식을 듣고 멀리서 3친구들이 문병을 위로심방을 왔습니다. 일이 묘하게 꼬여서 그만 토론이 시작되었습니다. 욥기 4장에 시작된 토론은 끝이 나지 않습니다. 무려 37장까지 계속하여 계속하여 에스컬레이터 되었습니다. 마침내 38장에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38:1-3절,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3.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40:2절,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보다 듣다 못한 하나님께서 참견하시고 추궁하십니다. 하나님의 준엄한 이 질책성 말씀에 대하여 욥이 하나님께 하는 대답입니다. 그래서 해결이 됩니다. 사람들끼리만 토론하고 의견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그 하나님 앞에 자기를 고백하니까 드디어 문제가 해결되더라 그 말입니다.

1. 피조물임을 고백하면 됩니다.
1,2절,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그렇습니다. 사람이 누구입니까? 정말 창조자이시며 전능자이신 하나님 앞에 자기를 세워 고백하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저 ‘저는 할 말이 없나이다. 저는 그저 한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 앞에서 이렇고 저렇고 따지고 대답을 하고 변명을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면 나는 그저 죄인입니다. 나는 그저 정말 부족한,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라는 그 고백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으니까 이러쿵 저러쿵 하지만 하나님 앞에 서면 우리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도 말할 것도 없습니다. 뭐 잘 났다고, 뭐 할 말이 많다고 입을 열고 그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피조물은 조물주 하나님 앞에서는 할 말이 없는 존재입니다. 40:2절,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그러시면 아무런 할 말이 없습니다. 나를 지으신 분, 그분 앞에 내가 뭐라고 말을 해요,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저 입을 다물고 나는 할 말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하는 정도일 따름입니다.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 앞에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고백입니다. 어떤 말도 할 것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 한계를 인정하고 그 초라함을 인식하는 것이 자기를 아는 인간입니다. 그 고백에서 시작되는 게 인생을 잘 알고 제대로 된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자기를 하나님 앞에 세우고 고백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어느 여름 한 바닷가에서 모 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이 여름 행사를 가졌습니다. 한 크리스챤 학생이 신앙을 이야기하고 천국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자 듣고 있던 교수가 온갖 이론과 해박한 지식을 동원하여 결코 신이 없다, 하나님이 없다, 천국이 없고 지옥이 없다고 강변하였습니다. 그러자 학생이 바가지 하나를 들고서 바닷물을 퍼서 교수에게 보이면서 ‘교수님이 가진 지식이란 바로 저 넓은 바다에서 이 한 바가지의 물과 같은 정도입니다’그리고 교수님처럼 믿고 살다가 보면 결국은 교수님이 없다는 그 지옥에 도달하게 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교수가 말을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닫고 말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창조주 앞의 인간이란 바로 이러한 바닷물을 담는 자그만 바가지 같은 그러한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미물같은 존재입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나는 피조물입니다. 한치 앞을 내다 보지 못하는 미약한 존재입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그래야 합니다. 이걸 고백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나약하기 그지없는 우리들입니다. 무얼 안다고 그리그리 떠들었는데 그런데 아는 게 아닙니다. 무얼하겠다고 용기를 가지고 시작하였는데 어느 덧 인생이 마무리가 되는 황혼에 도달하고 마는 게 우리 인생들입니다. 그리고 힘없이 가고 없어지고 마는 안개같은 존재입니다.

시90편의 모세의 기도입니다.
3-5절,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4.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5.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120세를 살고 200만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을 향하여 가면서 광야 40년간을 인도한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하는 고백입니다. 이게 우리 인생입니다. 티끌 같다는 말입니다. 열심히 그야말로 열심히 살았는데 불면 날아가 버리는 티끌같은 게 우리들 인생이라는 고백입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가 버리는 인생입니다. 순간을 사는 인생입니다. 120년 간을 살았지만 순간에 가 버리는 인생이었습니다. 홍수가 지나면 다 쓸려가 버리듯이 가 버리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잠깐 자는 것 같은 인생들입니다. 아침에 돋는 풀과 같은 것이 인생입니다. 무얼 하나 자랑할 것이 없는 우리 인생들입니다. 그야말로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인생 고백입니다. 우리가 다를 게 하나 없는 똑 같은 인생들입니다. 그래서 찬양합니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2. 나는 무능한 자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2-3절,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의 고백입니다. “주님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다” 그러나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은 스스로 자신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였고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한 존재라고 고백합니다. 무능함을 고백하는 인간, 그래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아멘하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못 하실 일이 전혀 없으시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으신 주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 놓을 것도, 자랑할 것도 전혀 없는 무능한 존재입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이게 무능한 인간의 고백입니다.

실제로 보면 그렇습니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의 저자 보세요, '악마가 되어버린 아들을 이해해 보려고 하는 피눈물 나는 수고'가 다 헛수고였다는 엄마의 고백입니다. 사건 이후 16년 간이나 그 아들을 이해하려고, 이해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피를 토하며 하는 말은 '나는 너를 알지 못했다' ‘나는 무능한 엄마였다’는 고백입니다. 내가 너를 낳았고, 너를 지키며 길렀고, 공들여 너의 인격을 만들어 왔고, 너랑 대화했고, 기도했는데 그런데도 나는 너를 너무나 몰랐다는 고백입니다. 이렇게나 무능한 엄마요 한 어른이요 한 인간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생각하면 내 자식을 비록 내가 낳았지만 내 마음대로 안되는 게 자식입니다. 총격소식을 들었을 때 당연히 내 아들이 피해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는데, 차라리 피해자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한탄했다는데, 내가 낳은 자식이지만 내가 자식에게 무얼 어떻게 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만 그러나 자식이란 정말 내 마음대로 되는게 없어요? 한계가 있어요?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 한 사람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세워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아무도, 아무런 도움도 도와줄 수도 없는 자기를 하나님 앞에 다 세워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욥이 잘못하였던 것이 있습니다. 인간이란 허약하고 나약한 존재임을 인식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무능함을 고해야 제대로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나 사람들 앞에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는 존재입니다. 그야말로 ‘무익한 종은’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고개 들고 자신이 있다고 자랑하면 하나님의 엄청난 책망을 받고 또 받습니다. 인간이 뭔데요?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은 것 같은데 실제로는 할 능력이 별로 없는 게 인간들입니다. 한계를 지닌 보잘 것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무능하기 짝이 없는 게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실제로 인간들은 자기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에 하여 해결하고 변화시킬 능력이 제한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처리하고 바꿀 능력이 그리 많지도 크지도 않습니다. 아니 별로 할 일이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오늘이라는 시간에 살다가 가는 존재입니다. 한없이 나약한 피조물입니다. 정말 미물보다도 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무익한 종은”이라고 고백하고 엎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도우시고 붙잡으십니다. 그 붙잡으심 아래서 사는 존재가 우리 인간들입니다.

눅17:10절,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제자들이 주님과의 대화에서 하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한 대로 다 하였다고 우리들에게 감사하겠느냐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저 이와 같이 주님의 명령을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라고 대답할 따름이라는 말입니다. 시킨대로 하였습니다.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것뿐이라는 말입니다. 이게 우리 인간의 현주소입니다.

이게 우리들 인간입니다. 제대로 살아보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게 의도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인생을 살다가 보면 엉뚱한 곳으로 가고 맙니다. 그래서 한계를 가진 무능한 인간입니다. 분명히 목표가 있었는데 그런데 가서 보니 다른 곳으로 가서 와 있습니다. 그래서 무능함을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무능한 나를 붙잡아 주소서’ 이게 한계를 가진 인생들의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무능함을 고백하고 인식하는 것, 거기서 제대로 된 인간의 시작입니다.


3. 하나님만이 해결자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5절,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은 하나님 앞에 드디어 맨 마지막의 고백을 합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그런데 이제는 내 눈으로 직접 주님을 만나서 뵈옵나이다라는 의미의 고백입니다. 그는 이제 직접 주님을 만났다는 이야기입니다. 말로만 아니라 주님을 만나서 문제를 풀고 그 안에서 드디어 해결의 길을 발견한다는 말입니다. 친구들과 그 긴 시간 말을 주고 받고 금식하고 대화하고 그래도 아무런 해결이 없고 그랬는데 이제사 실마리가 잡혔는데 그게 뭐냐? 주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결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인생의 방황은 하나님을 만나면 해결되고 신앙의 문제는 좋은 교회를 만나면 해결된다’라는 전도문구, 교회소개문구를 우리가 기억합니다. 그렇습니다. 맞고 지당한 말입니다. 우리들의 인생의 문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해결이 됩니다. 다른 곳에서 해결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해결이 가능합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천하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야 문제를 해결받고 문제가 풀려집니다.

예수 앞에 나오면 모든 죄 사하고 주의 품에 안기어 편히 쉬겠네
우리 주만 믿으면 모두 구원받으며 영생 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예수 앞에 나와서 은총을 받으며 맘에 기쁨 넘치어 감사하리라
우리 주만 믿으면 모두 구원받으며 영생 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예수 앞에 설 때에 흰옷을 입으며 밝고 빛난 내 집에 길이 살리리라
우리 주만 믿으면 모두 구원받으며 영생 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요4장의 수가성 여인을 보세요. 기가 막힌 운명에 묶여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무서운 여인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온 동리에 다니면서 내가 예수를 만났다고 여러분들도 그를 만나 보라고, 그렇게 전도하고 소리치며 다닙니다. 요8장의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붙잡혀 온 여인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기가 막힌 현실이고 얼마나 절박한 순간에 선 여인입니까? 세상에 세상에 사람 살다가 이런 일들을 만나면 이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모세의 율법대로 그대로 돌에 맞아 죽었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가 살아납니다.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그렇게 다시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 앞에 구원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사람을 살립니다. 복음이 사람을 세우고 건지고 살려 냅니다. 십자가가 구원입니다. 예수의 피기 구원입니다. 주님이 만지셔야 합니다. 이해되지 않는 순간에도 ‘왜 그랬니?’라고 물어보고 싶고 ‘도대체 무슨 이유니?’라고 묻고 싶은데 그런데, 그런데 결론은 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 순간에 ‘그래 그랬구나!’ ‘힘들었겠구나’ 이 한마디가 더 필요하다고 해결의 힘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그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가야 해결받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욥25:6,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 욥은 자기를 구데기 같다, 벌레 같은 존재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런 인생인데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까 내 존재감이 살아난 것입니다. 다윗의 고백입니다.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시22:5)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건설한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대왕입니다. 그의 재위기간은 BC 336∼BC 323년으로 그리이스, 페르샤, 인도, 이집트,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쳐 역사상 가장 넓고 많은 땅을 정복한 왕이었습니다. 스무살 나이에 왕이 되어 온 세계를 정복한 그는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으니, 나는 이제 심심해서 어떡하나!”라고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던 그 알랙산더 대왕이 인도를 정복하려고 공략 하던 중 조그만 모기에 물려 말라리아로 죽었다고 하니 정말 그 대단한 왕이 그 조그만 모기에게 물려서 죽었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습니까? 그의 유명한 유언이 “나를 묻을 땐 내 손을 무덤 밖으로 빼놓고 묻어주게. 천하를 손에 쥔 나도 죽을 땐 빈손이란 걸 세상 사람들에게 말해 주고 싶다네” 이게 인생입니다.

인간세상의 문제는 하나님 앞에 제대로 고백하면서 해결됩니다. 개인이나 교회나 큰 일을 앞두고는 그를 위하여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문제해결의 접근방식은 먼저 하나님께 엎드리는 일입니다. 사람들끼리 모여서 협의하고 의논하기 보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하나님의 개입을 기다리는 게 바른 방식입니다. 아니 협의하다가도 결론이 덜 나면 우리 한 주간 다시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립시다 그러는게 더 바른 해결의 길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하나님이 도우시면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신33:29절,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모세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사람으로 그 하나님 앞에서 행복한 사람이라는 표현입니다. 행복의 이유는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때문입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우리는 평범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고 행복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진리의 기준으로 보면 우리처럼 행복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창조주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했으며 내 안에 계시며 끝까지 나를 사랑하시고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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