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성경공부-이미지-2.jpg

찬양과 기도와 말씀이 살아있는 우리 교회

​택한 백성, 선한 이웃, 귀한 교회

말씀과 찬양.png

은혜의 물댄동산

​주일 대예배 설교

Sun Apr 17 2016 02:00:00 GMT+0000 (Coordinated Universal Time)

주보 :

제목 :

제목: 기쁨이 충만한 생활

본문 :

요일1:1-4

옛날에 한 임금이 자고 일어나면 귀가 쑥 자라고, 또 자고 나면 귀가 쑥쑥 자라서 어느 날 임금은 거울 앞에서 입이 딱 벌어져 버렸습니다. “으악! 내 귀가 당나귀 귀가 되었다”라고. 말 못할 걱정에서 한숨만 푹푹 내쉬던 임금은 큰 수건을 둘둘 말아 당나귀 귀를 가리고는 신하에게 “여봐라! 모자 잘 만드는 사람을 당장 내 앞에 데려오도록 하여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임금은 모자 만드는 사람에게 자기의 당나귀 귀를 보여 주고는 귀를 감출 모자를 만들라고 지시하면서 “내 귀에 대해 남에게 말했다가는 네 목이 달아날 줄 알아라!”라고 엄명을 내렸습니다. 모자 만드는 사람은 질긴 가죽으로 당나귀 귀에 딱 맞는 모자를 만들어 바쳤습니다. 그런데도 임금님 귀는 자고 일어나면 계속 커졌어요. 그 바람에 날마다 임금님의 귀를 재어 새 모자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모자 만드는 사람은 당나귀 귀를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서 남에게 말은 못 하고 속 답답해 죽을 것 같았습니다. 하루는 아무도 없는 대숲으로 가서 ‘더 큰 병 얻기 전에 혼잣말이라도 해야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실컷 소리치고 나니 속이 확 뚫려 살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부터 대숲에는 바람만 불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대숲을 지나던 사람들은 모두 그 소리를 들었고 소문은 재빨리 퍼지고 퍼져,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알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대궐 안까지 그 소문이 전해졌고 임금은 모자 만드는 사람을 불러서는 “네가 감히 죽고 싶어 다른 사람에게 말했느냐?”라고 호통을 칩니다. 모자 만드는 사람은 “소인은 하도 답답하여 아무도 없는 대숲에서 혼자 소리쳤을 뿐입니다.” 라고는 “그런데 “임금님 귀가 큰 것은 백성의 소리를 잘 들으라는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옵니다”라고 하자 임금님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그 뒤로 임금님은 큰 귀를 당당히 드러내고, 백성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려고 애썼고 마침내는 좋은 임금이 되었다고 합니다. 백성들은 당나귀 귀 임금님을 더욱 좋아하게 되었고 그래서 “당나귀 귀 임금님, 만세!”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새벽예배에서 에스겔 선지자의 에스겔서 39장으로 Q.T를 했습니다. 내용은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설명하신 이유는 23,24절에, “내 얼굴을 그들에게 가리웠었느니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리우셨기 때문에 그들이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고 그랬더니 그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고 70년 간이나 고생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그런 원인분석에 대한 정확한 말씀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우셨기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소통이 되지 않아서 대화가 안되었고 그래서 결국 포로가 되었고 그래서 기쁨이 사라지고 그래서 남의 나라의 포로로 잡혀 갔었어도 아무런 대책을 세울 수도 없는 속수무책으로 지내야 하는 그런 백성들이 되고 말았다는 설명입니다. 소통부재의 무서운 결과였습니다.

 

지난 주에 제 20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났습니다. 전혀 예상 밖의 선거 결과로 모든 사람들이 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하여서는 정치인들이고 국민들이고 언론이고 모두가 다 같은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짧은 평가로 줄이면 여당이 공천을 잘못했다, 청와대에 경종을 울렸다는 그런 평가입니다. 이 평가는 한마디로 여당이나 청와대가 국민들과 소통을 잘못한 결과이다는 말입니다. 청와대가 국민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정치권이 국민들과 소통을 못한 소통부재에 대한 결과라는 평가입니다. 정치에서 국민과의 소통이 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한가를 단적으로 알게 하는 이번 선거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소통은 대화를 하고 평안을 가져옵니다. 반대로 소통부재는 불통을 가져오고 불편하고 불행을 낳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제대로 된 소통, 이웃과 제대로 된 소통, 심지어는 자신과도 제대로 된 소통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제대로 된 소통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소통은 충만한 풍성한 기쁨을 가져옵니다.

1.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소통이십니다.

1,2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우리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 두시고 함께 교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에덴에서 범죄하고 나서는 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교제가 단절이 되어 버렸습니다. 범죄를 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이 찾아왔고 마침내 그들은 숲속으로 숨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소통이 단절되었고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는 단절이라는 엄청난 문제가 야기되고 말았습니다. 이 단절로 인하여 사망이 인간세상에 들어 왔고 그 사망이 인간세상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힘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사망의 자리에 소통으로 말씀이신 우리 주님이 오셨습니다. 임마누엘로 오셨습니다. 임마누엘, 임마누엘을 하나님이 우리와 더불어 소통하신 방법이었습니다. 임마누엘로 오신 그 주님은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생명의 말씀으로 오셨습니다. 말씀이라는 자체가 그 소통을 담고 있는, 소통을 포함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사람들에게 말씀을 하시면 그 거룩하신 말씀 때문에 사람들이 온전히 들을 수도 없고 살 수도 없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소통의 방법으로 육신의 옷을 입고 이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소통이십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함께 하셨고 소통으로 사람들과 함께 사시다 가셨습니다.

 

4,5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죽어가는 사망의 자리에 밝은 빛이 비췄습니다. 시편 107:14절에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의 얽어 맨 줄을 끊으셨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9:2절에는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이 끊겨진 사람들에게 소통으로 오신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생명으로 죽음 아래에 있던 우리들과 소통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사귐을 시작하셨고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땅에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소통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소통이셨습니다. 우리는 소통이신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았고 소통이신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소통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요? 예수님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일한 소통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살고 있는 인류에게 그들의 얽어 맨 줄을 끊으셨던 주님, 그분 만이 유일한 하나님과의 백성들 사이의 다리입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구원자 예수의 빛이 비치면, 소통이 가능하고 대화가 시작되고 그리고 역사가 나타나는 법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흑암에 있는 자들을 살리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소통이요 구원의 길이요 방편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복음은 소통입니다.

복음이 바로 소통입니다.

엡1:1절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즉 죽어가던 우리를 살리셨도다라는 복음, 이것이 영광 중에 계신 하나님과 죄악 중에 있던 우리 사이에 유일한 소통입니다. 전에도 없었고 이 후에도 없을 유일한 소통입니다. 그 복음, 이 복음이 바로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살렸습니다. 이것이 소통입니다.

 

이 복음이 예수님이 오셔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갈릴리는 온통 소통의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눅19:38절,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라고 천사들이 노래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기쁨을 찬양을 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나를 살리셨다라는 복음, 이 복음이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영원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살려 놓으셨습니다.

 

복음 중의 복음이 무엇입니까? 요3: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가 독생자를 너희들에게 주니까 너희들은 저를 믿어라 그러면 영생을 얻게 하겠다’라는 소통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복음이 바로 우리 하나님의 소통방법입니다. 복음이 하나님의 소통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범죄한 우리 인간들을 소통의 상대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받아 주셨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대화의 파트너로 삼아 주셨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죄로 인하여 죽어가던 수많은 우리 인간들을 그대로 유기하지 않으시고 찾아오셨고 그리고 대화의 파트너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소통의 복음을 받아 들이면 하나님과 소통이 시작되고 새 삶이 시작될 것입니다.

 

엡2:12-14절,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이 복음이 바로 하나님과 인류 사이의 유일한 소통이었습니다. 기다리신 아버지, 찾아오신 아버지, 그분이 소통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죽어가던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소통이 되기 전에는 분명히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습니다.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서도 외인이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소망도 없었고 하나님도 없던 자들이었습니다. 확실히 그런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고 하나님과 화평하여졌습니다. 이제는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로 허시고 소통을 열어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놀라운 축복입니다. 놀라운 기적입니다. 복음이 오기 전에는 그토록 멀리 있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가까워졌고 하나님과 화평하여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늘나라의 예약이 확정된 사람들입니다. 놀라운 축복입니다.

 

3절,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하나님과 사귐이 필요합니다. 본문은 그래서 쓰여진 말씀입니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사귐, 이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고 너희와 사귐, 즉 이웃과 사귐을 가지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이 소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소통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복음으로 인류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시는 하나님, 이런 놀라운 역사가 우리 주위에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

 

3. 소통의 결과는 기쁨입니다.

참 기쁨은 소통의 결과입니다. 대화가 기쁨을 가져옵니다. 소통이 우리 사이에 참된 기쁨이요 감격입니다.

 

4절,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왜 복음이 기쁨입니까? 왜 소통이 기쁨입니까? 소통이요 그 소통으로 인한 결과가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의 소통은 죽어가던 인류를 살리는 능력이었습니다. 감격이었습니다. 기쁨이었습니다. 소통은 능력이요 기쁨이며 에너지입니다. 복음은 능력입니다.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소통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놀라운 역사입니다.

 

엡2:4-6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보좌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앉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기쁨입니다. 이런 기쁨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놀라움이 복음이 아니고서는 그 어디에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소통으로 보내 주셨고 그 소통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하나님 보좌에 앉게 하신 놀라운 기쁨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소통은 엄청난 기쁨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와 같이 동족끼리 나눠져 있었던 독일이 지금은 통일 되었습니다. 동서독이 서로가 소통하고 대화하고 꾸준히 연결하여 가다가 드디어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독일이 우리와 똑 같은 상황이었던 나라입니다. 우리처럼 2차 대전 이후에 동서독으로 나눠져서 서독은 자유진영이, 동독은 공산진영이 차지하여 왔습니다. 그러다가 1990년 10월 3일에 베르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서독이 45년 만에 하나가 되고 통일독일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신나는 일이었습니까? 독일통일은 꾸준한 소통의 결과라고 알려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베르린 장벽은 동독 인민회의의 결정으로 1961년 8월 12일 밤 서베를린으로 통하는 모든 가능성을 봉쇄하기 위한 장벽이 설치되었습니다. 철조망과 블록으로 이루어진 장벽은 기관총 초소와 지뢰지역이 설치된 5m 높이의 콘크리트 장벽으로 대체되었으며 1980년대에는 고압선과 방어진지들이 45㎞에 걸쳐 구축되어 베를린 시를 양분하고 서베를린 주위로도 120㎞의 장벽이 축조되었습니다. 이런 베르린 장벽도 소통 앞에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그들의 꾸준한 소통은 고압선도, 기관총도, 콘크리트 장벽도 엄청난 방어벽도 다 무너뜨릴 수가 있었던 참으로 엄청난 위력이었습니다. 소통의 결과는 통일이라는 이러한 놀라운 기쁨이었습니다. 이렇게 소통은 우리에게 놀라운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우리는 왜 지금까지 세계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서 세계인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한숨거리가 되어 있는 것입니까? 한마디로 하면 소통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남과 북은 여전히 일방통행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전히 우리는 죽일 놈, 살릴 놈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갈등하며 등을 돌리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인데 소통이 없으면 결코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우리를 냉철하게 생각해 보면 ‘우리는 정말 소통이 잘 안되는 민족인가?’라는 점입니다. 소통이란 먼저 상대를 인정하고 상대의 의견을 듣고 그리고 내 의견도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하는 대화입니다. 일방적인 내 주장만 하면 그건 결코 소통이 아닙니다. 그건 불통입니다. 상대를 인정하는데서 소통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남북도 그렇고 정치에서는 여당도 야당도 그렇고 이 소통을 잘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늘 갈등하고 으르렁거리고 그럽니다.

 

교회에서도 소통하면 좋아집니다. 예배에 오긴 하는데 이웃 성도들과 전혀 소통하지 않으면 그대로 가지만 그러나 소통을 하고 대화하고 사귐을 가지면 거기에 커다란 신앙생활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옆에 있는 분들이 천국까지 함께 갈 형제들입니다. 이곳에서만 가까이 지내는 것이 아니라 영원까지 함께 갈 동지들입니다. 그들과 서로 소통하며 교제하며 살게 되면 그 기쁨이 영원까지 연결될 것입니다. 소통의 방법을 터득하고 소통의 길로 나아가세요. 그리고 그 안에서 참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프랑스가 낳은 세계적인 작가 빅토르 위고는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작품도 그의 모든 활동도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떠난 자신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기 주변과 가정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왔지만 그는 그걸 몰랐습니다. 드디어 사랑하는 딸 레오가 센 강에 몸을 던져서 스스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유서를 남겼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하나님 품 안으로 속히 돌아오십시오. 언제까지 그렇게 사시겠습니까?’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자기의 삶이 자녀에게 고통을 주고, 주변에 불행을 주는 것을 이 빅토르 위고는 몰랐습니다. 드디어 그는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모든 파리의 생활을 다 정리하고 시골로 내려 갔습니다. 그는 작품도 버리고, 인기도 버리고, 명예도 버렸습니다. 권력도 다 버렸습니다.

 

그 후 빅토르 위고가 회개한 다음에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작품을 썼는데 그 작품이 ‘레미제라블’ ‘노틀 담의 꼽추’ ‘지불라’ ‘노트르담 파리’ ‘빛과 그림자’ 같은 명작품입니다. 그야말로 세계적인 작품이 나왔습니다. 많은 내용이 딸과 관계가 되었다고 합니다. 자기의 과거의 삶을 비추어 주는 내용이 많았습니다. 그는 위대한 작가가 되었습니다. 전 국민의 존경과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도 행복했습니다. 그가 이 땅을 떠났을 때는 프랑스는 국장(國葬)으로 장례하였습니다. 그는 귀중한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난 순간, 하나님과 사귐이 시작되었고, 사귐이 시작된 순간,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안겼으며, 사랑의 품에 안긴 순간, 내 인생의 저주는 사라졌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면 하나님과 소통이 시작되고 교제가 연결되면 저주는 떠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은 벗어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슬픔과 고통은 끝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도 소통하여야 합니다. 솔로몬은 성전건축을 하고 하나님께 구합니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왕상3:9,10). 듣는 마음을 주세요라고 기도한 솔로몬의 기도를 하나님이 기뻐 받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듣는 마음을 주세요, 이게 좋습니다. 듣는 마음, 이 듣는 마음이 귀한 마음입니다. 듣는 마음이 소통하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셨습니다. 듣는 마음을 구하세요. 듣고 소통하는 마음을 구하세요. 그 듣는 마음, 소통하는 마음, 이 마음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 무척 기뻐하시고 흐뭇하여 하시는 마음입니다.

 

4. 참 기쁨은 오직 예수 안에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영국 폭력 서클의 일원이었던 17세의 한 소년이 당시 유명하였던 조지 워필드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여 후에는 아름다운 신앙의 시를 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옛 친구들의 유혹에 빠져서 다시 어둠의 생활로 돌아가 버렸고 교회와 신앙을 떠났습니다.

 

어느 화창한 주일 아침, 그 사람이 런던의 거리를 걷고 잇는데 마차 한 대가 앞에 서더니 “혹시 교회에 가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얼떨결에 “네”라고 대답하자 마차 안의 부인이 “타시지요”라고 권면하자 그는 그 마차를 탔습니다. 마차에 올라타자 서로 통성명을 합니다. 그러자 마차를 타고 있던 부인이 “그럼 제가 알고 잇는 그 로버트 로빈슨씨 맞습니까?”라고 물었고 그렇다고 하자 그가 지은 찬송시인 “복의 근원 강림하사 찬송하게 합소서”라는 찬양을 불렀습니다. 로버트 로빈슨은 부인에게 “그런데 저는 사실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지 아니하고 믿음을 떠나 있는 중입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자 부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시의 3절은 이렇게 쓰지 않으셨나요?” ‘주의 은혜 사슬되사 나를 주께 맵소서 우리 맘은 연약하여 범죄하기 쉬우니 하나님이 받으시고 천국인을 치소서’ 주의 은혜의 사슬에 선생님 자신을 매시도록 합시다라고 그를 교회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과 깊은 소통을 하고 참회와 공개서원을 하고서 그 후에 평생 동안 주님께 한신하고 인생을 아름답게 살았다고 합니다.

 

참된 평안과 참된 기쁨은 예수 안에 있습니다. 제대로 된 소통에서 가능합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맺음 :

“내가 다시는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리니” 소통하시겠다는 하나님, 이스라엘에게 놀라운 은혜가 내린 때였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포로에서 돌아오게 되었고 그들에게 평안이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참 기쁨은 하나님과의 원활한 소통으로 가능합니다. 이웃과의 원활한 소통으로 가능합니다. 소통은 행복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소통하는 신앙인, 하나님과 진정한 사귐과 소통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얼굴을 드시고 향하여 주십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민6:24-26). 하나님이 그분의 얼굴을 향하여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의 소통과 교제가 시작되고 그래야 진정한 기쁨이 주어지며 그래야 진정한 평강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소통으로 자신과의 진정한 소통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과의 진정한 소통이 역시 반드시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1.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소통이십니다.

2. 복음은 소통입니다.

3. 소통의 결과는 기쁨입니다.

4. 참 기쁨은 오직 예수 안에 있습니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