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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대예배 설교

Sun Mar 20 2016 02:00:00 GMT+0000 (Coordinated Universal Time)

주보 :

제목 :

제목: 겟세마네의 고난

본문 :

눅22:39-46

SNS에 올라온 어떤 글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갔다고 합니다. 가서 보니까 천사들이 뭘 열심히 포장을 하고 있더랍니다. 뭘하느냐고 물으니까 사람들에게 줄 복을 포장하고 있다고 하더랍니다. 복이 사람들에게 잘 전해지도록 포장을 해서 보내는 거랍니다. 그리고 복을 포장하는 포장지는 ‘고난’이라는 포장지라고 하더랍니다.

 

 

‘고난’은 단단해서 내용물이 파손되지도 않고 잘 볏겨지지 않으니까 포장용으로는 이 ‘고난’이 정말 제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천사가 하는 말이 그런데 사람들이 고난이라는 껍데기만 보고 그 안에 있는 복이 들어 있는 줄도 모르고 ‘어이쿠 무섭다’ 하면서 받지도 않고 피해 버리거나 받아 놓고는 껍질을 벗기고 그 안에 있는 복을 꺼낼 생각을 하지 않고 ‘고난’만 붙잡고 어쩔 줄 몰라 한다는 것입니다.

 

포장지를 어떻게 벗기느냐고 물으니까 ‘고난’이라는 포장지를 벗기고 복을 꺼내는 열쇠를 하나 주는데 그 열쇠는 바로 ‘감사’라는 이름이 달린 열쇠라 하더랍니다. 고난을 무서워하거나 피하려 하지 말고 감사하면서 받으면 그 껍질이 벗겨지고 그 속에 들어 있는 복을 받을 수가 있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고난’으로 포장된 선물을 받으면서 감사하기 보다는 불평을 해서 껍질이 더 단단해지는 바람에 그 안에 있는 복이 세상에 나와 보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 삶의 앞에 놓인다 해도 고난의 포장지를 벗겨낼 수 있는 지혜롭고 현명한 오늘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번 주가 예수님이 걸어가신 고난주간입니다. 오늘이 고난주일 첫날입니다. 나귀새끼를 타시고 개선장군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고난주간일정으로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이 주는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께 더 다가가는 주일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고난은 축복을 갖다 주는 지름길이다”라고 하였고 “하나님 앞에 진실되게 살려고 하는 이는 고통을 보석으로 삼는다”라고 일본의 유명한 그리스도인 하천풍언이 말했습니다. 지스레지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는 고생보다 더 중요한 교육은 없다”고 하였으며 “고난을 모르는 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없다” “고난이 크면 클수록 그 영광도 크다”고 한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의 고난은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고난의 길을 뒤따라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난주간을 걸어가셨고 그리고 결과는 승리자로 마감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난 뒤에는 승리가 잇습니다. 고난 뒤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고난 뒤에는 천국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난주간에 모두 승리하시길 축복합니다.

 

 

1. 고난을 앞에서 기도하신 주님

39,40절,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그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엄청난 고난의 길을 앞두고는 기도로 무장하여야 합니다. 러시아의 속담에 전쟁에 나갈 때 한번 기도하고 바다에 나갈 때 두 번 기도하고 결혼 할 때 세 번 기도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전쟁도 고난이요 바닷일도 고난이고 결혼도 고난인가 봅니다. 결혼을 앞두고는 세 번 기도하래요. 모든 일들을 기도로 차근차근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로 준비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야 이기고 극복하시는 힘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게 없으면 결코 이길 수도 없고 넘어 갈 수도 없고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지도 못합니다. 신앙의 사람들은 기도의 동산에 올라야 합니다. 기도하여야 승리하고 기도하여야 마귀를 이기고 기도하여야 자신을 이깁니다. 여러분은 문제를 앞에 두고 무얼로 준비하고 대비하시는 신앙입니까? 어떤 사람은 한숨으로 무장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저기 전화하고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내공을 쌓기도 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점쟁이를 찾아가서 앞으로 어떻게 될까를 물어보고 도움을 요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가 그리스도인들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문제를 앞두고 겟세마네로 오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앉아 예배하는 이 교회당이 겟세마네입니다. 우리가 엎드리는 이 기도처가 겟세마네입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그 자리가 겟세마네입니다. 겟세마네에 오르세요.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세요.

 

주님은 이제 공생애 3년 간의 모든 공생애사역을 끝마치고 정리하시는 중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인류구원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마지막 코스인 십자가라는 클라이막스를 앞두고 골고다 언덕을 항하여 달려가시는 중입니다. 겟세마네에 오르신 우리 주님의 마음은 정말 무척이나 처참하셨습니다. 그 마음의 진솔한 표현이 마태복음에서는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예수님이 직접 이런 표현을 쓰시기까지 고민이 되셨고 심히 슬퍼하셨고 심지어는 죽게 되었다고 표현하셨습니다. 이런 고민의 시기에 겟세마네에 기도하시기 위하여 올라가신 주님이십니다. 얼마나 암담하시면 죽게 되었다라고 말씀을 하시겠느냐는 겁니다. 우리 말로 ‘죽겠다’ 그 표현입니다.

 

혹시 여러분에게는 이러한 죽을 지경이었다란 그런 시기가 없었나요? 있었다면 그 시점에서 여러분은 어떻게 하셨나요? 그걸 어떻게 대처하였고 그리고 어떻게 극복하여 왔는지 생각해 보세요. 몇가지 대처방안이 나옵니다. 우선, 얼떨떨하게 될 것입니다. 뭐가 뭔지 잘 모르고 얼떨떨하고 정말 기가 막혀 하고 그럽니다. 그걸 수용하기가 어렵고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지는 법입니다. 그래서 어안이 벙벙하고 정신이 없게 되어집니다. 이게 우선 맞아들이는 첫반응이요 순서입니다.

 

그러다가 정신이 좀 들면 이런저런 궁리를 하게 됩니다. 여러가지 복잡한 일들이 생각나고 떠오르고 그럽니다. 온갖 생각들이 머리를 복잡하게 할 것입니다. 지나간 일들도 생각이 나고 앞으로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도 막 떠오르고 복잡하고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어지고 머리가 하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온갖 생각이 다 들곤하는 게 일반적으로 큰 일을 당하는 사람들이 심리적인 현상입니다.

 

그러나 가장 바른 방법은 바로 예수님이 취하신 이 방법입니다. 겟세마네 기도에 오르는 것입니다. 기도의 처소에 올라가는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 현재 자신이 처한 이 어려움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해결하여야 하는지를 묻고 그리고 그 해결의 방안을 구하는 일입니다. 내가 생각하여 내 방법으로 해결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을 묻고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리는 일입니다. 그야말로 끝장 토론을 벌리는 일입니다. 이게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자세입니다.

 

유다왕 히스기야 시절에 앗수르의 산헤립이 침공해 와서 선전포고를 하자 전쟁포고문을 받아든 히스기야 왕은 성전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는 그걸 펴 놓고 하나님 앞에 적나라하게 하나하나 고하면서 정말 진지하게 기도합니다. “그 글을 여호와 앞에 펴 놓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만국에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눈을 뜨고 보시옵소서”라고 절절히 기도를 합니다(사37:14절 이하).

 

히스기야 왕의 이 기도문은 기도가 뭔지, 성도가 하나님 앞에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를 정말 상세하게 보여주는 말씀들입니다. 성도가 기가 막히는 문제들 속에서 어떻게 하는지를 알려 주는 대목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를 드리려고 성전에 올라가야 하였고 기도의 내용을 들고 하나님 앞에 구하여야 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보시옵소서’ ‘이걸 보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차례입니다. 성전의 히스기야왕도, 겟세마네의 예수님도 고난 앞에서는 같은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살면서 수시로 다가오는 엄청난 난제들을 당면하면 우선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저 낙심하고 한숨만 쉬고 있다면 그건 신앙적 태도가 아닙니다. 이사야서 31:1절은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라고 말합니다.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고 성전에 올라가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문제의 해결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위기에서는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서 무릎으로 해결하시는 성도가 제대로 된 성도요 그게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자세인 것입니다.

 

2. 무릎꿇은 고난

41절, “저희를 떠나 돌 던질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기도는 고난입니다. 기도는 고통을 수반합니다. 기도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그저 되는 것도 아니고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고난을 수반하는 행위입니다. 고난의 과정을 통과하여야 기도가 열리고 하늘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위하여 조용한 장소로 나간다, 그리고 기도로 무릎을 꿇는다 이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성도는 문제 앞에서 기도하여 하고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기도하려면 용기가 필요하고 자기 절제가 필요합니다. 가끔 기도하기 위하여 기도원에 가려고 하기만 하면 이상하게도 일이 생깁니다. 개인 일이 생기든지 가정에 할 일이 생기든지 아니면 교회의 일이 생기든지 이상하게도 일이 생깁니다. 옆사람의 기도가 거스립니다. 남들이 하는 기도가 내 기도를 막기도 합니다. 이게 참 이상한 일입니다. 그래서 기도원에 가는게 망설이게 되고 주저주저하게 되고 그러다가 그만 뒤로 미루게 되는 일들이 한 두번이 아닙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모처럼 새벽기도를 시작하여야지 그렇게 마음을 먹고 시작하면 그때부터 이상하게 몸이 무거워지고 일이 하나하나 생기고 그럽니다. 괜히 변명거리가 생기고 걱정거리가 일어나고 그럽니다. 그러다가 그러다가 미루고 미루고 그럽니다. 왜요? 마귀는 성도가 기도하는 일을 막고 있고 방해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기도하면 마귀의 영역이 침해를 당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면 성도가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루게 하고 그래서 방해거리를 자꾸만 제공하는 법입니다.

 

초대교회에서 가장 영향력을 가진 인물 중의 한 사람인 야고보서의 저자 야고보 선생, 그는 예수님의 친동생입니다. 그는 예루살렘교회에서 사도들 못지 않게 아니 그보다 더 정말 엄청나게 역할을 하고 간 인물입니다. 그가 죽어 장례하고자 하였을 때 그의 무릎을 보니까 마치 낙타무릎 같더랍니다. 얼마나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는지를 알게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낙타 무릎! 그렇습니다. 성도는 낙타무릎을 가진 자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는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게 고통이요 그게 고난이지만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사역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고역이기도 합니다. 기도하기 위하여 고통을 당하고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가서 무릎을 꿇어야 제대로 기도가 가능합니다. 무릎꿇는 고난, 이걸 통과하여야 제대로 된 신앙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무릎을 꿇었다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고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무릎을 꿇었다가 850명을 상대하여 기도전쟁에서 이기는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무릎을 꿇는 것은 고난입니다. 그러나 능력입니다. 연약한 무릎들이 하나님 앞에서 잘 꿇어지기를 바랍니다. 거기에 고통이 있어도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고난이 따르고 다가와도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고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들이 되는 법입니다. 무릎 꿇는 고난, 무릎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 여러분이요 제가 되길 희망합니다. 거기에 신앙의 승리가 보장되어 있고 거기에 인생 승리가 포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힘들 때, 어려울 때, 무언가가 잘 풀리지 아니할 때, 그때에 겸허하게 무릎을 내리는 고통, 그걸 잘 감수하시기 바랍니다.

 

3. 자기 뜻을 거두는 고난

42절,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유명한 기도의 장면에서 가장 클라이막스가 바로 이 구절입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분명한 자신의 의지를 거두고, 뜻을 거두는 일은 분명 고난입니다. 이게 아닌데, 내 뜻은 이건데 라는 분명하고 확실한데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그러면 그걸 굽히고 그 뜻을 접는다 그게 보통의 고난이 아닙니다. 이게 자기의 뜻을 거두는 고난입니다.

 

예수님은 그 고난의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는 엄청난 부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습니다라는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그게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예수님은 기도를 드리셔야 하였습니다. 이게 고난인 것입니다. 원하지 않는데, 나의 원은 따로 있는데 그걸 접어야 하고 그걸 내려야 하는데 그게 고난인 것입니다.

 

요즘 각 정당에서 우리나라 제 20대 국회의원 공천중입니다. 분명히 내가 국희의원이 되어야 한다고, 그리고 내가 국회에 들어가야 한국 정치, 아 나라 정치가 굴러가고 국가가 제대로 된다고 야단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다 선택되면 좋은데 그게 그렇게 다 안 됩니다. 떨어지고 실패하고 그럽니다. 그 때에는 자신의 뜻을 거두고 내리기가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이게 고통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일정한 정도의 자신들의 의지가 있고 희망이 있고 하고 싶은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있고 저에게도 있습니다. 그걸 실행하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욕구를 내리고 접으려면 그것도 엄청난 고난입니다. 그것도 정말 싫고 힘이 드는데 그걸 접고 내려야 한다면 그건 더 고난일 수 있습니다.

 

마시멜로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압니다. 어린아이들에게 마시멜로를 하나 주고는 5분을 기다리다가 먹으면 하나를 더 주겠다고 약속하고 지금 먹으면 주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당장은 먹고 싶지만 먹지 않고 5분을 주면 다른 마시멜로를 주겠다는 것은 인내를, 고난을 이기고 견뎌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눈앞의 마시멜로를 드시겠습니까? 아니면 기다리시겠습니까? 참는다는 것은 분명히 고난이지만 그러나 그 고난을 견디고 참을 그때에 아이들이 맛있는 마세멜로를 하나 더 먹게 됩니다. 하나를 더 먹기 위하여 참아야 한다면 그건 고난이요 심하면 고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고 하였습니다(히12:16). 세상에 수 많은 마시멜로가 있습니다. 그걸 참아야 한다니 그게 고통이요 고난인 것입니다.

 

겟세마네의 주님의 기도는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백미는 바로 ‘내 원이 있지만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의 내용입니다. 여러분, 기도가 뭐냐? 내 원과 아버지의 원의 합일점을 추구하고 발견하고 그걸 만들어 내고 도출하는 그런 과정입니다. 이게 겟세마네의 기도입니다. 주님은 겟세마네에서 그런 역사를 하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의 간절한 겟세마네의 기도의 내용은 바로 ‘나의 원대로’를 접고 ‘아버지의 원대로’를 찾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이게 우리 주님의 그 유명한 겟세마네의 기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할 수만 있으면 이 십자가를 피하고 싶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 십자가의 잔이 피하여 가길 간절히 소망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겟세마네에 오르시고 기도하신 것이고 제자들에게도 함께 기도하자고 요청하신 것입니다.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사실 이런 기도를 드리는 게 우리에게도 수 없이 많고도 많을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할 수만 있다면, 주여 할 수만 있다면 이걸 나에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그것이 얼마나 많으냐 그 말입니다. 이게 우리입니다.

 

기도하는 성도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아버지, 이건 죽어도 안됩니다. 이건 정말 안됩니다. 아암. 그렇고말고’ 이런 것이 있으면 그 사람은 제대로 된 신앙인이 못됩니다. 죽어져야 합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이게 자유롭고 이게 정말 쉬워져야 합니다. 기도가 뭐냐? 내 뜻을 내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세우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저 나의 원대로 응답하여 주세요 그건 하나님을 내가 이용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자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는 능력을 얻는 것이 기도입니다.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아버지의 원대로 살도록 기도로 엎드리기 바랍니다.

 

4. 결단하고 일어서는 고난

그런 간절한 기도를 드리신 다음 주님은 제자들에게 다가가서 말씀하십니다.

45절,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기도했으면 일어나야 합니다. 기도했으면 결단해야 합니다. 매일 엎드려서 기도만 하고 있으면 안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응답받고 결단하고 이제는 일어나 걸어갈 차례입니다. 일어나서 가자고 하여야 합니다. 그게 기도하는 사람이요 믿음의 삶이요 믿음 그 자체입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그렇습니다. 이게 고난입니다.

 

피어슨이란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중국 상해에 갔다가 울고 있는 한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사연을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이러하였습니다. “저는 21년 전에 아무도 찾지 않는 티베트 접경에 선교사로 파송 받았습니다. 2년 만에 1여자를 구원하였고 21년 동안 8명을 구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제 딸에게 문둥병 기운이 있어 아내와 딸을 치료차 미국으로 보내기 위하여 이곳 상해에 나왔습니다. 아내와 딸은 미국으로 조금 전 떠났고 저는 내일 티베트로 혼자 돌아가게 됩니다.” 이 말을 들은 피어슨 선교사는 동정하는 마음이 생겨서 말했습니다. “선교사님, 제가 비행기 표를 사 드릴테니 미국에 가서 딸을 잘 치료하고 아내와 함께 다시 선교지로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때 그 선교사는 말했습니다. “저는 아내와 딸을 보내서 울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방금 전 잠깐 잠이 들었는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종아, 내일은 나와 함께 잃어버린 영혼을 찾으러 티베트접경으로 다시 돌아가자. 나와 함께 그 곳으로 가 줄 사람은 너뿐이구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는 이 말씀을 생각하고 너무 황송하고 감격이 되어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이 역사에 등장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디서 일어나야 합니까? 그런데 아직도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앉아 있거나 누워있지는 아니합니까? 일어서야 하고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나가야 합니다. 이게 힘든 고난의 길입니다. 일어나려면 반드시 힘이 들고 어렵고 고난이 수반될 것입니다. 그러나 일어나야 합니다. 고난을 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맺음 :

고난은 성도에게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고난 없는 부활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고난주간에 승리하셨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그 고난의 길을 뒤 따라가는 고난입니다. 승리가 보장되어 있는 고난입니다. 그 고난이 면류관입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당하는 고난, 이게 신앙의 흔적입니다. 신앙의 계급장입니다.

 

시편 119:71절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고난을 당하는 그것이 제대로 된 신앙의 길입니다. 신앙에서 고난을 기꺼이 당하고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

 

벧전4:15,16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베드로 사도의 확약입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고난 뒤에는 온전함이 따릅니다. 굳게 하심이 따릅니다. 강하게 하신다고 보장하셨습니다. 터를 견고하게 하여 주신다고 확실하게 약속하셨습니다. 겟세마네의 예수님처럼, 고난의 그 길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걸어가는 오늘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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