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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 Feb 11 2018 02:00:00 GMT+0000 (Coordinated Universal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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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유로운 영혼, 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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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창 22:6-12
지금 강원도 평창에서 동계올림픽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유치작전 3수 만에 대회유치에 성공하여 8년 동안을 준비하여서 열리는 전 세계 젊은이들의 겨울축제인 이번 올림픽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성공적 올림픽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정말 이번 평창올림픽이 안전하게 잘 진행이 되어 세계인들의 평화의 축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어제는 첫번째 금메달을 하나 따서 정말 신나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올림픽하면 하계올림픽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IOC 회원국으로 인정받아 지금부터 70년 전인 1948년 제14회 런던올림픽에 참가한 것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12년 먼저 1936년 독일의 베르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2시간 29분 19초 2라는 세계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딴 일이 우리 민족의 아픔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당시 손기정 선수는 시상대에서 고개를 숙이고 월계수관을 쓴 모습이 우리에게 기억에 생생합니다. 나라 잃은 설움, 이것이 베르린 올림픽이요 손기정선수의 기록입니다.
손기정 선수의 사건이 여기서 끝나지 아니하고 일장기 말소사건이라는 것으로 연결됩니다. 독일 올림픽 고원에 서 있는 손기정 선수 가슴의 일장기가 맞지 않다고 동상이 세워진 공원에 몰래 들어 가서 일장기를 태극기로 바꾼 유명한 사건입니다. 생각하면 좀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이웃 나라이 일본과 치열한 갈등 속에서 지금도 지내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는 자유, 평화, 독립 이런 생각들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자유를 그리워하고 평화를 좋아하며 독립되이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어떤 글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각 나라를 대표하는 열사람이 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그 배의 수용 인원은 7명이었습니다. 이것을 무시하고 그만 10명이 타 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배가 한창 항해를 하다가 그만 풍랑을 만나 큰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3명이 배에서 내리지 않으면 배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순간 서로 눈치 보면서 누가 먼저 양보해 줄 것인가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먼저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났습니다. 영국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저는 대영제국의 국민입니다. 제가 대영제국의 신사도를 발휘해서 여러분을 살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이빙을 해서 물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 다음엔 또 누가 뛰어 들 것인가 눈치를 보고 있는데 두 번째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미국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저는 아메리카에서 온 사람입니다. 세계 최대강국인 미국 사람이 양보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습니까? 제가 여러분을 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사람도 물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바로 그때 세 번째 사람이 벌떡 일어났습니다. 대한민국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갑자기 ‘대한민국 만세’를 세 번 외치고 나더니 옆에 있던 일본 사람을 밀어뜨렸다고 합니다. 이것은 좀 극단적인 예화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한 악감정도 많고 컴플렉스도 많습니다. 왜냐면 지난 과거에 일본으로부터 36년간 나라를 잃고 자유를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이 얼마나 민족적 자유를 갈망하는 줄 아십니까? 그 자유를 위해 애국열사들은 목숨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자유를 빼앗겨 본 민족일수록 자유가 얼마나 고귀한지를 압니다. 그러기에 1945년 8월 15일, 일본으로부터 자주 독립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민족의 자유뿐 아니라 개인의 자유 또한 정말 중요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생명보다 소중합니다. 그래서 패트릭 헨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이것은 자유가 생명보다 귀하며 자유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말이 아닙니까? 자유의 감정만큼 우리 존재에서 떼어놓기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명인생에서부터 저 야만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은 차별없이 자유의 욕망으로 침투 당해 있습니다. 아니 자유를 향한 동경이나 사랑은 비단 한 인간에게뿐 아니라 모든 생물에게까지 심어 주신 하나님의 선물임이 틀림없습니다. 자유의 갈망은 짐승의 본능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인물 가운데서 정말 자유함을 누리며 살다가 간 사람이 누굴까, 생각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이삭입니다. 이삭은 정말 자유를 깊이 생각하면서 비교적 자유로이 살다간 인물입니다. 사람들마다 그 삶을 들여다 보면 특징들이 있기 마련인데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삭의 아들 야곱은 얍복강으로 유명한 위대한 기도의 인물이었습니다. 기도로 쟁취하고 빼앗아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요셉은 한마디로 기다리며 인애하여 소망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삭은 어떤 인물입니까?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은 어떤 인물입니까? 그는 별로 한 일이나 인생의 특징이 잘 두드러지지 아니합니다. 이삭에 대한 성경의 기록도 가장 적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유심히 읽다보면 이삭은 한 마디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인물입니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이삭, 이삭을 봅니다.
1. 생명에 대하여 자유로운 영혼, 이삭
이삭의 이삭됨의 가장 큰 정점은 아무래도 모리아 산의 사건일 것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로 아버지가 100세 일 때에 출생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을 받게 됩니다.
1,2절,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 아버지는 아들 이삭을 데리고 종과 함께 모리아 산을 향하여 출발합니다. 한참을 가서는 종들을 산 아래에 머물게 하고 이삭에게 장작을 지우고 부자가 둘이서 열심히 산을 향하여 올라갑니다. 이 때에 유명한 대화가 나옵니다. 아들 이삭이 아버지께, “아버지 나무도 있고 불도 있는데 제사드릴 제물은 어디에 있나이까?”라고. 그러자 아버지 대답이 ‘제물은 여호와 이래이신 하나님이 예비하셨을 것이야’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정말로 아리송한 대답입니다. 그래도 이삭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산 정상에 오르고 하나님께 제사 드릴 제단 준비를 하였고 마침내 준비가 끝나자 아버지가 갑자기 아들 이삭을 붙잡아 묶습니다. 아들을 묶어 제물로 드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은 그대로 실행합니다. 그런데 이삭으로선 이게 뭡니까? 도저히 이해할 수도 인정할 수도 결코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한 일이며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아들 이삭으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지만 이건 윤리적으로도 상식적으로도 어떤 것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신앙적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자식을 드리는, 사람을 태워서 드리는 제사가 어디 있습니까? 이건 정말 아닙니다. 여기까지 와서 이제 단둘이 있는 모리아 산 정상의 이 자리인데 아무리 아버지이지만 이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이삭의 그 다음 행동을 보세요. 그는 조용히 그대로 결박을 당합니다. 아버지가 자기를 묶으려 할 때도 그대로 조용히 당하면서 아무런 말도 반항도 하지 아니하였고 그대로 수용합니다. 아니 오히려 아버지가 자신을 묶을 때에 잘 묶을 수 있도록 몸을 돌려주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삭은 하나님과 아버지 사이의 깊은 대화를 알고 수용하였을 것 같습니다. 분명히 자기의 아버지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분이심을 믿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아버지 사이의 그 무언가의 대화, 어린 이삭으로서는 아직 이해가 되지 아니하였지만 그러나 분명히 그게 있었을 것이고 아버지는 그것에 따라서 그렇게 행동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을 것입니다. 결코 아버지가 아무런 명령을 받지 아니하고는 이렇게 행동하실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대로 수용한 것입니다.
일반적인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이 현실을 이삭이 수용하는 것입니다. 왜요? 무엇이요? 아니 우리 아버지가 나를 죽이지는 않을 거야! 그런 확신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아브라함처럼 죽어도 다시 살아날거야 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기록들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삭이 반항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수용하였고 아버지 아브라함은 마침내 시퍼런 칼을 아들에게 내리치려고 칼을 뽑아 팔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하나님이 보셨습니다.
아무리 설명하고 아무리 이해하려고 하여도 이해도 설명도 안됩니다. 그러나 한가지, 더욱 이해 불가능한 것은 이삭의 자세입니다. 어떻게 조용히 눈감고 기다리고만 잇을 수가 있는 일입니까? 생각해 보면 이삭, 그는 정말 말 그대로 자유로운 영혼의 사람입니다. 무슨 마음일까요? 그는 자기의 목숨에 대한 일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를 의지하여 수용하고 받아드리는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생사화복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고 굳게 믿고 이 순간 그대로 ‘아멘’하고 눈을 감고 믿은 사람입니다. 자신의 생명에 대하여 자유로운 사람 이삭입니다. 생명에 대하여 자유로운 영혼 이삭, 그렇습니다.
모리아 산의 사건은 이삭의 그런 자유로움을 보이는 사건입니다. 나의 죽고 사는 일, 내 자신의 생사화복, 그것을 그야말로 내 삶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손에 그대로 올려 놓는 사람, 세상말로 주여 죽이든지 살리든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이게 생사에서 자유로운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위기에서도 발버둥 치지 않고 온전히 밑고 여유있게 대처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내 삶을 주관자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사람, 맡기는 사람, 생사화복의 주관자, 역사자에게 그대로 맡기는 사람, 순응하려는 사람, 이게 이삭이요 죽음 앞에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이렇게 이삭은 하나님께 자신의 운명, 목숨을 온전히 맡기고 살아가는 자유로운 영혼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는 왜 이런 황당한 일이 일어나는지를 잘 몰라요, 그러면서도 여기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인도하심이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아브라함을 인도하시고 역사하셔, 그러면서 아멘하면서 따라가고 순종합니다. 내 인생도 하나님이 맡으시고 인도하셔, 그러면서 이 분야에서는 철저히 맡기고 이미 마음을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평정을 찾은 사람이요 평화를 심은 사람입니다. 이미 이러한 관계정립을 하고 나서는 전혀 갈등하지 아니하고 평안과 평정을 유지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경우는 그대로 믿고 맡기고 아멘하면서 얼마든지 따라가려는 자세를 가진 평화로운 인물입니다.
내 인생의 주관자, 내 삶의 인도자, 나를 이 땅에 내려 보내셨고 지금도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언젠가는 나를 영원한 곳으로 데려가실 분,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내 삶의 모든 것들이 바로 그 분께 달려 있다, 그리고 반드시 그분이 나를 선대하시고 인도하신다, 참새 한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그 분의 뜻이 아니면 결코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내 인생도 그분이 인도하시고 섭리하신다 라고 굳게 굳게 믿고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에 아멘하며 맡기는 그리고 내 인생에 대하여 여유를 가지는 자유로운 사람들, 그러나 큰 바탕에서 하나님께 맡기고 사는 자유로운 영혼의 사람들입니다. 거기에 화평이 주어지고 평화가 올 것입니다. 맡기는 사람, 평화로운 인물, 나를 내리고 내걸 양보하고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사람, 그게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삭은 이런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내 인생 여정 끝내어 강 건너 언덕 이를 때..
하늘 문 향해 말하리 예수 인도하셨네...
매일 발걸음 마다 예수 인도하셨네..
2. 경제에 대하여 자유로운, 이삭
이삭은 그랄 지방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엄청나게 부를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창26:12).
이렇게 이삭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랄 지역에서 1년에 농사의 100배나 수확을 하고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마침내 거부가 되고 심히 창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엄청난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자 그랄 사람들은 이삭에게 소떼와 양떼가 많아지는 것을 보고 시기하여 짐승들이 마실 물을 주지 아니하였습니다. 사실 이삭은 과거에 아버지 아브라함이 파 놓았던 샘을 팠었던 것입니다. 이 샘은 블레셋 사람들이 메워 버린 샘이었는데 이삭이 물줄기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팔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 사람들이 와서 이 샘은 원래부터 우리의 것이라고 다시 빼앗아 버립니다. 메꾸어진 것을 네가 팠으니 원래는 우리의 것이라고 억지를 쓰니까 아버지가 팠고 다른 사람들이 관리를 잘못하여 메워진 것을 자기가 다시 판 것인데 불구하고 그랄 사람들은 떼를 쓰고 빼앗아 버린 것입니다. 이삭은 그 우물을 양보하였습니다. 달라는 사람들에게 주는 이삭입니다. 경제에 대하여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이삭은 물질에 대하여 경제관념에 대하여 생각이 많이 열려 있었던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요즈음 말로 경제관념에 대하여 참으로 많이 열린 사람입니다. 이삭은 또 다른 곳에 가서 또 다른 샘을 팠고 그것도 그랄 사람들은 자기들의 것이라고 또 빼앗았습니다. 그랄 사람들이 이삭을 보니까 그는 무슨 일을 하든지 일이 너무나 잘되고 그 잘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이삭이 판 우물을 빼앗아 버립니다. 이삭은 또 다른 데로 옮겨서 다시 우물을 팝니다. 그러면 또 와서 시비하고 그 우물을 빼앗았습니다, 그러면 이삭은 또 피하여 다른 곳으로 갑니다. 분명히 그들을 대항하여 싸워야 하고 다투고 전쟁하며 시시비비를 가려야 하는데도 전혀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이삭은 그저 양보를 하고 다른 지역으로 옮겨서 또 다시 샘을 팠습니다. 마침내 이삭은 다 양보하고 브엘세바로 떠납니다. 경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철저히 믿으며 살았던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생각하면 이삭은 먹고 사는 일은 다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대로 양보하고 양보하고 또 물러납니다. 누가 죽기 살기로 내 것이야 하고 덤비며 달라고 하면 그대로 줘 버리는 사람입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5:39-42). 그야말로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렇게 양보하고 너그러이 살아간 이삭입니다. 경제에 대하여 자유로운 영혼입니다.
경제에 대하여 정말 절대로 양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 것과 하나님의 것을 정확하게 구분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니 내 것도 내 것이고 하나님의 것도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지는 사람들입니다. 주머니를 꼭 닫고 도저히 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실제로는 정확한 구분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경제에 대하여 자유로운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것과 나의 것을 제대로 구분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요한 칼빈은 “우리의 문제는 교회에서 돈에 대해 너무 많이 이야기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해서 바르게 이야기하지 않는 것에 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보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헌금을 하려면 그 생각의 기준을 ‘이렇게 헌금하는 것이 나에게 다소 희생이 된다’는 그 정도의 수준으로 드리면 된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돈에 대한 태도를 보면 하나님께 대한 태도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감리교 창설자 요한 웨슬리는 “그의 지갑이 회개하지 않으면 그의 회개를 믿을 수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내 지갑을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열지 않아, 꼭꼭 닿고 지켜야 해, 그건 좋은 믿음이 아닙니다. 물질에 대하여 마음이 열리고 생각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성전 입구에서 성전에 들어가면서 헌금하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보시다가 한 과부가 드린 헌금을 들어서 ‘그 생활비의 전부를 넣었느니라’라고 칭찬하셨습니다. 헌금은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의 믿음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일에 열려 있는 사람들, 그들이 물질에 대하여 열린 사람이라고 주님은 칭찬하신 것입니다. 오늘 새벽에도 고전 16장에서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에 모두가 다 연보하고 나누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연보하고 헌금하는 일, 그 일에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삭 보세요. 이삭은 참 멋진 사람입니다. 이삭은 자기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도리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매 그들이 먹고 마시고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 지갑을 열고 마음을 열고 베풀고 나누고 세우고 그리고 돕고 이웃과 화평을 심는 물질에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랬더니 그들도 평안히 갔더라. 나도 평안, 너도 평안, 모두가 평안함, 이것이 바로 지갑을 열고 물질에 자유함을 가진 자들에게 주어지는 열매인 것입니다. 이삭처럼 물질에 대하여 자유로운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물질에 대하여 열려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 화평이 주어지고 조화로운 결과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평화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3. 생각에서 자유로운 사람, 이삭
아버지 이삭은 나이가 들어서 아들을 축복합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아버지의 축복이 절대적인 권한과 힘을 가지던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불행하게도 맏이인 에서를 축복한다는 게 속아서 동생 야곱을 축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걸 알았습니다. 작은 아들이 자기를 속인 것입니다. 아비가 눈이 멀다는 약점을 아내와 자식이 함께 이용한 것입니다. 이 기막힌 사실을 안 큰 아들 에서가 기리기리 뛰고 울고 불고 야단하였습니다. 잘못하면 자식들 간에 살인이라도 날 판입니다. 기가 막힌 위기의 현실이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이삭의 판단이 중요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알자 이삭은 엄청 떨었습니다. “이삭이 크게 떨며 이르되”(창27:33). 35절, “이삭이 이르되 네 아우가 와서 속여 네 복을 빼앗았도다”
이삭은 이 일에 대하여 무척 놀랐고 가슴을 쓰러 내렸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전개될 일을 바라보고 무서워 떨었습니다. ‘아니 동생이 작은 놈이 이렇게 눈이 멀다고 나를 속여, 괘씸한 놈’ 그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큰 아들 에서는 울고 불고 야단입니다. 이삭에게 매 달리면서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라고 애걸복걸합니다. 그런 현실에 눈이 멀고 나이가 든 이삭이 처해 있었습니다.
이런 기막힌 현실을 맞는다면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하게 될 것 같습니까?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 눈이 멀다고 애비를 속여, 괘씸한 일이네’ 그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게 정상적인 생각일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시 내가 내 아들을 축복하지 그러면서 맏이인 에서를 안고 축복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속여서 받은 축복기도는 헛 것이야, 하나님이 다 아셔,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기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가질 수 있는 그런 생각을 그대로 고수하려고 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순종하려고 마음을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에서에게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의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주었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창27:37).
그리고는 자기의 생각을 바로 정리합니다. 생각을 내립니다. ‘분명 여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으리라’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전개된 사실을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입니다. 비록 자신의 눈이 어두워서 뭘 제대로 보지 못하여서 실수한 일로 여겨지지만 그래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어쩌면 이삭은 자기를 속인 아들을 대한다는 것조차 싫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라고 믿고 내 생각을 정리하고 받아들이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수용합니다. 사실 이러기도 쉽지 않지만 그러나 그대로 수용하고 맞이합니다. 대단한 신앙이요 생각의 자유함입니다.
사람은 누구나를 막론하고 자기의 생각을 접고 내리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자신의 생각을 접고 뜻을 내리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자신의 생각을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들에게 더 그러합니다. 그래서 확신하고 그래서 뜻을 잘 굽히려 하지 않습니다. 열왕기하 5:11을 보면 아람 장군 나아만이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라고 내 생각에는, 내 생각에는 그렇게 말합니다. 어쩌면 정상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겟세마네의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렇게 이삭은 하나님의 뜻 앞에서 자기를 접고 잘 내리는 생각에 자유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이게 축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 앞에 섰을 때에 내 생각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내 생각에는 내 생각에는 나아만이 되지 말고 이삭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다면,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된다면, 내 생각을 내리고, 접고,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생각에 자유로운 영혼이 될 때에 거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맺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