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택한 백성, 선한 이웃, 귀한 교회
찬양과 기도와 말씀이 살아있는 우리 교회
은혜의 물댄동산
마태복음 강해
Wed Jan 16 2019 10:30:00 GMT+0000 (Coordinated Universal Time)
목차
제 1 편
제목 : 주님 족보의 의미
본문 마1:1-17
마태복음 수요강해
제 1 편
제목 : 주님 족보의 의미
(죄많은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애절한 마음이 그대로 담겨있는 사랑의 족보)
본문 : 마1:1-17
-
이 족보는 성경이 어떤 책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부터 그리스도까지 대에 걸친 약 1942년간(B.C.1938 ~ A.D.4) 의 긴 족보를 신약성경 첫 부분인 마태복음 서두에 기록함으로써 성경 전체의 내용을 개괄해 주고 있습니다
2. 이 족보는 성경이 인간 입장에 대하여 배타적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에 의해 분석되고 이해되는 것이 아니며 성경이 스스로 자신을 해석하고 증거합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성경이 말하려고 하는 것을 그대로 듣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모범입니다 (빌2:5-9).
성경이 인간을 정의하고 논증하고 분석하는 것이지인간이 성경을 정의하고 논증하고 분석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한 태도로 경외심을 가지고 말씀을 대하여야 합니다 (삼상3:10).
3. 겸손함이 업는 성경지식은 참혹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4.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의 의미
1) 예수께서 혈통적, 법적 자격에서 다윗 왕가의 계승자이심을 밝혔습니다.
다윗 왕권이 B.C.586년 예루살렘 함락 이후 근 세기가 흐르는 동안 거의 단절되었기 때문에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다윗의 왕권을 이을 자라는 법적 근거, 곧 그분의 정통성(Royal Legitimacy) 을 증명하지 않는 한, 절망 속의 유대인들은 아무도 그를 메시아로 인정하지도 환영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후손이심을 강조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창12:1-3:17) 그의 후손을 통하여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창22:18, 갈3:16).
하나님은 다윗에게 영원히 그를 버리지 않으시며 (시89:29), 그의 자손으로 그의 나라를 계승하게 하고, 그 왕위와 나라가 영원토록 견고한 메시아 언약을 주셨습니다 (삼하7:12-16, 사9:6-7, 행13:23, 롬1:3, 계22:16, 사11:1).
3)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적 권위를 지닌 이상적 왕이심을 밝히셨습니다.
열국의 아비 아브라함은 히브리 공동체의 모태이며 (창12:2, 15:6), 다윗은 히브리 왕국의 실질적 건국자요 모범적 왕이었습니다 (삼하7:12-16). 이런 조상들의 혈통을 이은 예수야말로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절대적 통치자요 진정한 왕, 곧 메시아라는 사실을 주장함으로써 (행2:30) 다윗의 왕권은 600년 만에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4)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자입니다.
마태는 믿음의 조상 (창15:6, 롬4:3) 들이 유대 백성들을 대표하여 불린 바 있듯이 (창18:18, 삼하7:26), 그리스도는 모든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구속 사역을 통해 영영한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실 분이심을 묵시적으로 나타내고자 한 것입니다 (히9:28).
5) 명칭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
예수 그리스도’는 사명적 명칭인 예수와 직능적 명칭인 그리스도가 결합된 구세주의 공식호칭으로, “구약 예언에 따라 오신 메시아”에 대한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을 담은 명칭입니다.
6) 세계의 개념
세계의 개념은 '탄생기록', '역사기록', '족보기록' (A record of Genealogy, NIV) 등의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구약이 세계의 기원에 관한 창세기로 시작하지만, 신약은 그 세계를 창조하신 성자 하나님의 '탄생 기원에 관한 책'으로 시작합니다. 신약 첫머리에 족보가 기록된 것은 구약과 신약이 서로 깊은 연관 관계가 있음을 웅변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첫머리에 족보를 기록한 그 자체가 신 구약을 한데 묶어 전서로 이어줘야 할 이유를 입증하는 것입니다
5. 이 족보는 신약뿐만 아니라 성경전체의 개괄적 의미를 보여줍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는 이 첫 구절을 통해서 이 족보는 구약 없이 신약을 이해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아브라함의 부르심은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에서 성령님은 아브라함의 부르심은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기 위함임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한 개인을 부르시든 전 인류를 부르시든 간에 하나님의 부르심은 왕이 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계22:5).
2) 다윗에서 바벨론 포로까지
이 구절에서 성령님은 왕이 되기 위하여 부름 받은 우리가 죄를 범함으로 죄의 종이 되었음을 통렬히 고발하십니다 (요8:34). 왕이 되어야 마땅할 우리가 우상을 섬기고 다른 신을 음란하게 섬김으로 마귀의 포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렘2:14).
3) 바벨론 포로에서 그리스도까지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포로 된 자에서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케 하시고자 오신 것임을 보여줍니다(눅4:18).
6. 이 족보는 성경이 역사적 기초 위에 서 있음을 보여줍니다.
7. 이 족보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부터 요셉 때까지 거의 2,000년의 긴 세월 동안 다윗의 후손을 대망해 왔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가 이 족보에 기록되지 않았다면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라는 말처럼 그냥 소망 없이 끝났을 것입니다 (창40:8). 이 족보는 그리스도 대망의 여정이요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으로 그들의 소망이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고난의 민족에게 소망이었듯이 우리에게도 역시 소망이 되시는 것입니다.
8. 이 족보는 하나님의 은혜가 개인적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족보 속에는 위대하고 거룩한 성인들의 이름으로만 채워진 것이 아니라 악하고 추한 죄인들의 이름도 기록돼 있습니다. 아하시야 (왕하8:26), 요아스 (왕하12:1), 아마샤 (왕하14:1), 여호아하스,여호야김, 시드기야 등은 악한 왕들이었습니다.
이 족보에 악한 자나 선한 자가 함께 기록되어 있는 것은 선악의 의미가 사람에게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 안에 있는 자는 선하다고 간주하시며 아들안에 없는 자에게는 어떤 선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구원은 선악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소속, 곧 편의 문제인 것입니다.
어떤 개인이 얼마나 선하냐 악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선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선악 문제가 아니라 누가 예복을 입었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마22:10). 이 족보는 선악을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관된 것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9. 이 족보에서 여인들의 이름이 기록된 것을 주목해 봅시다.
이 족보에는 부끄러운 여인들의 이름이 넷이나 있습니다 모계(母系)를 무시하는 유대의 족보 관습상 본 족보에 등장한 여인의 이름 (다말, 라합, 룻, 밧세바)은 매우 예외적인데, 특히 예수의 족보 서술상 반드시 필요한 마리아를 제외한 네 여인의 이름이 기록된 것은 상당히 충격적인 것입니다.
라합과 룻은 이방여인입니다. 기생 라합은 가나안 여인이며 (수2:1-7), 나오미의 며느리 룻은 모압여인입니다 (룻1:4). 신명기 23장 3절에 이방인들은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시아버지 유다와 간음한 다말 (창38:13-18), 다윗왕과 간음한 우리야 의 아내 바세바(삼하11:13-18)는 간음한 여인들이었습니다.
여인의 이름이 족보에 기록되기도 어려운데 이렇게 죄 많은 여인들의 이름이 기록된 참 의미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진리는 아름답게 장식된 것이 아니라 사실 위에 있습니다.
허물을 감추지 않는 성경의 진실함을 바라봅시다. 어떤 개인이 역사를 기록하면 그 사람에 의해 모든 사실은 변색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객관적인 사실로서의 역사는 방법론에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성령님은 귀추 불문하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셨습니다. 진리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족보가 말하는 명제인 것입니다. 위장되고 장식된 아름다움을 주님께서는 가증하게 여기십니다.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여호와의 단을 쌓고 (신27:6)"라는 말씀은 인간적으로 완전하게 보이는 것이 진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이 진리라는 말씀입니다.위장된 사람은 추함이 사실대로 드러난 사람보다 치료하기가 힘든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호되게 저주하신 것이 외식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은 정죄하지 않으셨으나, 외식하는 자들은 마태복음 23장에서 7번이나 '화있을찐저'라고 가혹하게 책망하셨음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은 인간의 무죄성이 아니라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를 자랑할 수 있는 의인은 없습니다 (갈3:10, 시51:5)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습니다 (롬10:3-4).
범죄한 인간의 정상적인 자세는 회개와 순종 이상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에 사람이 그 앞에서 취해야 할 정상적인 자세는 회개와 순종인 것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무죄를 추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금하십니다. 피조물의 완전은 논리적으로도 모순이며, 피조물의 무죄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족보에 기록된 많은 사람들은 무죄한 사람들이 아니라 용서받은 의인들입니다. 특히 이 여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를 기뻐하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이 족보에 기록된 죄 많은 네 여인의 이름은 용서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중주인 것입니다.
3) 이 족보에 죄 많은 여인들의 이름을 기록하심으로써 허물 많은 나를 위로하시는 하나님.
주님께서는 이 족보의 죄인들을 통하여 허물 많은 나를 위로하십니다. 내가 주님을 만나기 위해 성경의 문을 열고 들어설 때 성령님은 나 같은 죄인을 격려하시며 저 여인들을 보고 위로를 얻고 담대 하라고 용기를 주십니다. 만일 내가 성경을 여는 순간 실수가 없고 위엄이 넘쳐흐르는 위대한 인물들로만 꽉 짜여 있다면 나는 얼마나 기가 죽고 의기소침했을까요? 그러나 성령님은 한 가운데 당당히 서 있는 너와 같은 저 죄인들을 보라고 속삭여 주십니다.
맺음
주님께서 사랑하시어 자상하게 준비해 두신 그 은혜를 찬양합시다. 이제 사랑의 주님께서는 이 족보에서 모든 사람을 부르고 계십니다. 인종과 민족과 성별과 모든 것을 초월하여, 라합과 롯을 불러 영광의 반열에 세우신 주님은 이 시간 나와 여러분들도 부르시며, 다말과 우리야의 아내에게서도 영광을 받으신 주님은 지금도 모든 죄인을 불러 영광 받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모두 이 족보 속에서 허물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사1:18).
아멘